조선의역사

조선시대 호적대장를 읽어보자

백삼/이한백 2015. 3. 18. 11:15

조선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전체 거주민을 대상으로 호적대장을 작성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운영에 필요한 수

만큼 기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었다.


각 군현은 3년마다 호적을 만들 때, 모두 3부를 작성하여 1부는 해당 고을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감영과 한성부에

올려 보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방대한 양이 축적되었겠지만, 현재 조선의 호적은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 지역의 호

적만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몇몇지역 호적은 일본에 있다한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이 호적을 주목하는 것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만든 기록물이고, 비록 그 내용은 단편적이지만 

당시 인구의 절대 다수를 이루던 하층민들에 대한 정보가 무수히 등장한다는 점에서다. 그 기록들을 맞추어 가다 

보면 한 인물이나 가계의 구구절절한 삶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 것을 이용하여 당시 시대상을 재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호적에는 호의 대표자인 주호(主戶)부부와 그의 조상및 가족, 그리고 소유한 노비의 정보가 담겨 있다.

대개 주호가 자신의 가족과 소유노비현황을 적은 호구단자를 관청에 제출하고, 관에서는 이를 호적대장에 정리

했다. 주호는 자기가 소유한 노비의 일부분만 호적에 올렸다. 호적에 올리지 않더라도 노비문서가 있었기 때문에

소유를 입증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호적에 등장하는 노비에는 여러 유형이 있었다. 도망노비(도망간 연도 표기, 나중에 붙잡았을 때 대조하기 위함),

죽은 노비(사망 연도 표기, 지난 호적 직성후 죽은 노비), 타지역 거주 노비, 같은 마을에 살면서 별도의 호를 구

성한 노비(별호 표기),솔거노비(특별한 표기 없음)들 이었다. 


평민들의 경우, 호적이 새로 만들어질 때 나이나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나이를 늘렸는데 이는 군역

을 지는 전체기간을 줄여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군역 기간은 16-60세까지다). 이름을 바꾸는 경우는 자신의 과

거를 숨기거나 질병치료, 기복등 다양한 목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향은 양반도 마찬가지였다.


자 그럼 경상도 단성현에 거주하는 김흥발의 1717년 호적기록을 읽어 보자.

 

古邑大村  第一統 統首 御保 金興發 

 고읍대촌 제일통 통수 어영청 보인 김흥발


第一戶 御保  金興發 年 사십구 己酉 本 金海

 제일호 어영청 보인 김흥발 나이 49세 기유생 본관 김해


父 納粟通政大夫 수봉 祖 어련 曾祖 이동 外祖 李今金 本 永同 

부 납속통정대부 수봉/ 조부 어련/ 증조부 이동/ 외조부 이금금 본관 영동


妻 卞召史 年 사십삼 乙卯 本 草溪

부인 변소사 나이 43세 을묘생 본관 초계


父 通政大夫 해금 祖 해룡 曾祖 덕수 外祖 私奴 정립

부 통정대부 해금/ 조부 해룡/ 증조부 덕수/ 외조부 사노 정립


子 碧溪驛 金貴奉 保 金伊達 年 십칠 辛巳

아들 벽계역 김귀봉의 보인 김이달 나이 17세 신사생


婦 周召史 年 십칠 辛巳

며느리 주소사 나이 17세 신사생


 

子 금철 年 오 癸巳

아들 금철 나이 5세 계사생  


(해설)

당시 고읍대촌 1통 1호에 거주했던 김흥발은 부인과 2명의 아들을 두었고 17세인 큰 아들은 동갑내기 부인을 

었다. 당시는 5가작통법이 시행되던 시기였고 김흥발은 오늘날의 통장이나 반장에 해당하는 통수였다.

통수는 5가에 대한 행정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주로 호구 이동에 대한 보고나 세금 납부등과 같은 자질구

한 일들을 책임졌기 때문에 양반들은 맡지 않았다.

조선의 호적대장은 오늘날의 주민등록부처럼 주민의 실제거주지를 중심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김흥발은 실

로 그 마을에 거주했었다.


호적대장에서 남성을 살펴보는 데  주의깊게 볼 것은 직역이다. 직역은 일종의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회적 신분을 고려해 남성들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인 직역을 부과했다. 양반들은 관직유무에 따라 관직

명과 유학을 직역으로 사용하여 군역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평민들 대다수는 정병,수군,보인 같은 직역을 떠안아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김흥발은 도성방어를 담당

하던 어영청에 소속된 군인을 보조하는 보인이었다. 보인은 군역을 이행하지 않는대신 매년 군포 2필씩을 어영

청에 받쳤다. 당시 군역은 평민 남성만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평민신분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은 노비층을 제외하고 자신의 이름을 공식적인 문서에 기재하지 않았다. 또한 결혼한 뒤에는 자

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특별한 지칭어가 사용됐는데, 양반여성

은 성씨 뒤에 씨(), 중인 여성은 성(性), 평민 여성은 소사(召史)를 붙였다. 만일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그 여성은 노비같은 최하층민일 가능성이 높았다. 김흥발의 부인은 변소사였으므로 평민 출신이었다. 


신분이란 원칙적으로 혈통을 따라 세습되었으므로 김흥발의 두 아들 역시 평민에 속했다. 큰아들은 벽계역의 역리

였던 김귀봉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보인이었다. 둘째 아들은 아직 어려 직역이 없다.


이제 그들의 사조, 즉 아버지, 조부,증조부, 외조부를 살펴보자. 


김흥발의 아버지 김수봉은 납속통정대부였다. 국가에 상당량의 곡식을 바치고 정3품 통정대부라는 관품을 받은 

것이다. 물론 명예직이지만 군역이 면제됐다. 또한 경제적 여유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인물들이다. 김흥발의 조부 어련, 증조부 이동, 외조부 이금금은 모두 직역이 기재되지 않았다. 

평민이라면 주로 군역 명칭으로 나타나야할 직역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부인 변소사의 가계를 보자. 변소사의 아버지 해금의 직역은 통정대부였다. 하지만 조부 해룡과 증조부 덕수 

시 직역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외조부 정립은 사노였다. 

조선시대에는 아비나 어미 가운데 한 명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이란 원칙이 오

동안 통용됐다. 즉 그녀는 노비 가계에서 태어 났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속량되어 평민이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김흥발 부부의 가계에서 직역이 기재되지 않은 조상들의 기록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그리하여 김흥발의 

형제자매와 그 전에 작성된 호적들을 추적한 끝에 김흥발의 아비 수봉이 사노비출신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참고)

1. 노비에서 양반으로/ 권내현 지음/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