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우리는

1941년 서울-조선신궁,경성신사

백삼/이한백 2015. 3. 11. 12:15

 

 

총독부는 1920년 5월 27일 남산에서 신사 건립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5년간의 공사를 거쳐 마침내 1925년 10월 신사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총독부는 1925년 6월 27일자로 ‘조선신사’를 ‘조선신궁’으로 개칭했습니다.)

 

 

                                                               -참배하는 모습-

 

 

 

 

 경성신사는 통감부 설치 이전인 1898년(명치 31년)에 지금의 예장동인

왜성대에 시사를 설치하고 진좌제를 개최하여 경성신사를 설치하였습니다.

경성신사는 처음에 일본을 위하여 설치되었지만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황국신민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36년간 신사총수는

1141개소를 설치하여 우리민족을 황국신민화 하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일제 36년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치 일제강점기 기간을 36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경성부세일반(1942년발간)를 보면 흥미로운 곳이 나와 있습니다.

 

조선신궁과 경성신사.

조선신궁은 대정14년(1925년)에 설립되었고,

경성신사는 명치31년(1898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898년?

아니 그 때에 벌서 신사를 설립?

그렇다면 이미 그 때에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실제로는 그들의 통치기간은 50여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1941년도 서울인구는 974933명이었습니다.

조선인 815154명.일본인154583명. 외국인 5196명.

그런데 참배자수는 조선신궁 2339164명,경성신사 1566666명으로

400여 만명입니다.

무려 서울인구의 4배였습니다.

물론 서울인구만 참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숫자가 대단하지 않나요?

서울이 그렇다면 전국의 참배자수는 얼마나 많을까요?

과연 자발적이었을까요?

 

또 당시

형무소 재소인원은 4450명이었고

니취자(泥.진흙.醉.술취할)-술중독자가 2399명이었습니다.

 

또 불교신자가 약 9만명,신도신자가 3만5천명,기독교신자가 3만명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이 책속에는 행려병자 수. 행려병 사망자수, 범죄별 인원수, 교량,

여관등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들어 있습니다.

 

참 철두철미한 일본인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런 속에서 견디며 살았습니다

'그때 그시절 우리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69년 대한민국의 일상 사진.  (0) 2015.03.13
의미가 남달랐던 조선운동회  (0) 2015.03.13
유흥주점의 변천사! 60~70년대 광고  (0) 2015.02.26
추억의 달력  (0) 2015.02.26
어릴적추억  (0) 2015.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