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6·25와 한미동맹

백삼/이한백 2015. 3. 9. 15:53

25와 한미동맹
주한미군 주둔 법적근거 마련

▲6·25와 주한미군
6·25 때 미국은 1개 야전군, 3개 군단, 8개 보병사단, 1개 해병사단, 28개 보병연대, 54개 포병대대, 8개 기갑대대를 투입해 전쟁을 치렀다. 한반도에 전개된 미군은 일본과 하와이·오키나와·본토에서 동원돼 한국에 투입됐다. 미국은 1950년 7월 1일 스미스부대를 파한한 이래 그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51년 6월 말 미지상군은 25만여 명, 52년 6월 말에는 26만여 명, 휴전 때는 30여만 명에 달했다.

이때 미군은 8군을 비롯해 3개 군단(1·9·10군단), 8개 사단(2·3·7·24·25·40·45·1해병사단)이 한국에 주둔했다. 6·25에 참전한 미군은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후 철수하기 시작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감축계획에 따라 이뤄졌다. 철군은 54년 3월부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부대가 미45사단이다. 이 사단은 54년 3월 14일 인천항에서 이한식을 마친 후 뉴욕으로 출항했다.

이어 미40사단이 철수했다. 40사단은 54년 5월 8일 해산식 후 인천항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54년에 미25사단·2사단·3사단·24사단이 철수했다. 한국전선에 첫발을 내디뎠던 미24사단은 54년 11월 6일 강원도 양구에서 이한식 후 일본으로 철수했다. 이때 8군사령부도 일본으로 이동했다가 57년 7월 1일 유엔군사령부와 함께 서울로 복귀했다.

이후 주한 미지상군은 미7사단과 1해병사단뿐이었다. 최초 미국은 한국에 2개 사단을 주둔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미국은 55년 1해병사단이 철수하자 1기병사단을 파한했고, 1기병사단이 65년 베트남전에 참전하자 미2사단을 파한했다. 그러나 2개 사단 주둔 원칙은 69년 닉슨독트린의 발표로 71년 미7사단이 철수하면서 인디언헤드부대인 미2사단만 남게 됐다.

▲태평양 방위선과 휴전선
미국이 6·25를 휴전으로 종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군사력이 부족하거나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수행할 준비를 충분히 갖출 때까지 소련·중공과의 충돌을 회피한다는 전략이었다. 또 미국은 서유럽 중심의 세계전략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미국의 군사력을 전부 투입할 수 없었다.

이에 미국은 중공군 개입 이후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전쟁 이전 상태 회복이라는 최초 유엔 목표에 기여할 수 있는 38도선 부근에서의 명예로운 휴전을 모색했다. 전쟁 이전 애치슨 국무장관의 한국을 포함하지 않은 태평양방위선 연설은 한국 정부를 경악게 했을 뿐만 아니라 6·25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그런데 휴전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에 휴전선을 포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까지 공산침략을 막는 봉쇄선 역할을 하던 38도선 대신 정전협정으로 생긴 휴전선은 전시 태평양방위선 역할을 하게 됐다. 이제 미국에 휴전선은 소련과의 전면전시 미극동군이 공산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사수할 태평양방위선이 됐다. 이를 확인해 준 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태평양 안보를 위해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휴전선은 미국에 단순한 휴전선이 아니라 평시 소련의 팽창을 막는 봉쇄선이자 전면전시 미국이 반드시 사수해야 할 태평양방위선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녔다. 이는 6·25 때 약 14만 명의 미군 희생을 바탕으로 성립된 한미동맹의 결정체였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