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시인 윤동주(尹東柱)..오늘은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신지 70년이 되는 날입니다

백삼/이한백 2015. 2. 17. 09:43

민족지사 조만식 선생이 세운 평양 숭실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1936년 3월, 가장 친한 벗 문익환과 함께 고향인 용정(중국 지린성 용정시)의 명동촌으로 돌아왔다. 일제가 모든 학생에게 모란봉 정상 부근에 있는 평양 신궁에 가서 참배하라고 명령했는데, 두 사람은 이를 거부하고 귀향한 것이다. 참배 강요는 일왕 히로히토가 둘째 아들을 낳았고 이를 축하하라는 의미였다. 

당시 명동촌 지도자였던 김약연 선생과 마을 사람들은 19세 두 청년에게 올바른 행동이었다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에게 신사 참배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밝게 하라’는 뜻이 담긴 명동촌(明東村)은 1899년 김약연과 문익환 고조부인 문병규를 중심으로 4가구, 141명이 집단으로 이주해 구성된 특별한 마을이었다. 

이들이 간도로 이주한 데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옛 조상의 땅에 들어가 이를 되찾는다. 둘째, 북간도 넓은 땅을 이용해 이상촌을 건설한다. 셋째, 인재를 양성한다. 이런 민족의식을 지닌 명동촌에서 교육을 받은 윤동주가 신사 참배를 거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윤동주는 평양 신궁에서 학교 여학생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노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시 장면을 묘사하며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女兒)들이 저도 모를 이국(異國) 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라는 구절을 자기 시 한쪽에 남겨 놨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일제 세뇌교육으로 어린 여학생들이 일본어를 쓰고 있는 가슴 아픔 현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민족 시인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오는 16일은 28세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 시인이 서거한 지 70주년 되는 날이다. 한국뿐 아니라 몇몇 일본 문학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윤동주 시비를 설치하는 모임도 발족할 예정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자기반성이다. 하루속히 군국주의와 신사 참배를 버리고 일본이 새롭게 태어나길 기대한다.

[김준혁 한신대 正祖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