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안중근" 의사 사진의 진실

백삼/이한백 2015. 1. 12. 16:52

 

 

 

 

 

위의 두 사진은 우리가 흔히 종종 볼수 있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사진을 조작해서 일부러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초췌하고

뭔가 주눅이든 모습으로 사진을 조작했다고 합니다.

 

첫번쨰 사진처럼 사진을 일부러 조작해서 엽서로 만들어서

안중근 의사를 깍아내리기 위해서 일반 대중에게 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도 일부러 안의사님을 범죄자처럼 보이기 위해서

무릎을 꿇게 만들어서 죄인처럼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또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가락을 자른 모습을 비하하기 위해

일본 야쿠자들이나 범죄자가 손가락을 자른것처럼 깍아내리고

안중근 의사의 단지 동맹을 비하했다고 합니다.

 

오늘(15일) 오전에 방송된 "안중근 105년, 끝나지 않은 전쟁"이란

다큐프로에서도 나왔듯이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악랄하고 비열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실제 사진은  밑에 사진처럼 비록 일제에 의해

붙잡혀서

고초를 격었지만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  안중근 (자: 안응칠)
      독립운동가
    출생-사망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 1910년 3월 26일
    가족
    동생 안공근, 안정근,   손녀 안연호
    수상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경력
    1908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1907 돈의학교 설립
    1906 삼흥학교 설립

     

    1879년(고종 16)∼1910년. 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성격은 바른 말을 잘 하고 어떤 외부의 기세에도 굴복하지 않는 단호함을 지녔다고 합니다.
    (공부하는데 도움이 됐길 바래요)
    1. 가계와 성장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여 자가 되었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류(史記類)를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하여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고종 31)에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하여 동학군의 진압에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다음해에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아서 많은 일을 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稧: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뒤로 교회의 신자들과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2. 교육활동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지면이 있는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행동화하기 시작하였다.
    3. 북간도 망명과 독립운동
    이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한 뒤 약 3, 4개월 뒤에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하여 비밀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그러나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천여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천신만고로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 이범석(李範奭)  등 애국지사를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4. 비밀결사 단지회 조직
    1909년 3월 2일에는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서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5. 이토 암살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 遠東報》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하여   이토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하여   만주에 오게 됨을 알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에 대한 중대모의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6. 법정에서의 태도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힌 다음 거사 동기를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는데   안중근은 일반살인피고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선변호인   미즈노는 검찰관에 대한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하여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는데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 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된 행동의 인간상으로서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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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본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어려서   안응칠(安膺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  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혹은   도마 안중근)라고도 불린다.

     

    생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하얼빈 역 전 역인 채가구 역, 창춘 역에서도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암살 계획이 있었으나, 각각 철통 같은 수색과 역장의 의심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안중근 이전에도 안양에서 원태우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 으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고종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55분 순국. 

     

    이토 히로부미 사살의 영향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1927년부터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 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합방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 합방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동경에서 한일 합방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동양평화론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는데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사상이었다.

     

    평가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 즉, 안중근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 역사서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이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안인수, 진해 현감 역임

    아버지 : 안태훈(泰勳), 진사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부인  : 김아려(金亞麗)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 안정근,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남동생 : 안공근,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큰아들 :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병으로 사망.

    작은아들 : 안준생(俊生),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둘째며느리 : 정옥녀

    딸: 안현생, 생사불명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조카 : 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의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조카 : 안춘생,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손자 : 유일한 손자로, 안웅호(雄浩)는 안준생의 아들이다.

    증손자 : 토니 안(안보영)

     

    저서 및 유묵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기념 사업

    1958년 -“애국열사 안중근”은 북조선에서 창작, 공연되었다.

    1963년 -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으로 윤치영이 취임하였다.

    1974년 - 안중근 기념 동상이 작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에 설치되었다.

    1979년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조선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

    1979년 - 명동 천주교회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가 집전되었다.

    1986년 -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중국 뤼순 감옥을 방문하여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다.

    1990년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를 발간하였다.

    1999년 -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공원 조성 제안을 부결하였다.

    2000년 -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2000년 - 하얼빈 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이 열렸다.

    2001년 -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안중근”이 독일에서 초연되었다.

    2002년 - 오페라 “안중근 손가락”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

    2002년 - 안중근 의사 국제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2003년 -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2004년 - 안중근의 삶을 그린 《도마 안중근》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연출가는 서세원이다.

    2006년 - 가짜 안중근 휘호가 8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2008년 건조된 한국 해군의 1800톤급인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되었다. 안중근 잠수함은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었다. 안중근함 진수식에는 김태영 대한민국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관계자와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2009년 - 안중근의 사망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 100주년을 기념해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동방의 빛(가제)이 2010년에 방영할 예정이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부친의 개화사상으로 근대적 사고 키우며 성장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 지주였다. 고려 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 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의사의 집안은 갑신정변 직후 해주를 떠나 신천군의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친이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던 관계로 수구파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따라서 의사는 청계동에서 성장하면서 8세 때부터 조부의 훈도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의사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 ‘토마스(도마)’ 부여 받아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의사의 부친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 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자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이 다시 강력하게 양곡 반환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의사의 부친은 인근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사의 부친은 프랑스인 빌렘(J. Wilhelem)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청계동으로 귀가한 부친은 1897년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 받았다.

     

     

    학교 설립하며 교육계몽운동 전개

    의거 직후 찍은 의사의 전신 사진.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의사는 그 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 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군과 전투, 박애주의 근거해 포로 전원 석방해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흔히 이범윤 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의병부대였다. 김두성이 총독,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이었던 의사가 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을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08년 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리하여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의사가 독립전쟁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1909년 1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한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 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는데, 사장인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이후 의사 일행은 유동하, 조도선 등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키고 만주 철도의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순국 5분전에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사형을 언도 받고, 거사 이유를 밝히는 저술에 심혈을 기울여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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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Golway, Fl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