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백삼/이한백 2013. 10. 23. 18:06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신라 568년, 비석 높이 155.5cm,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원위치에는 복제비가 세워져 사적으로서 장소적 의미만을 지키고 있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 확장사업을 성공리에 마친 뒤

561년에는 창녕에 척경비(拓境碑)를 세우고

뒤이어 새로 편입된 한강 이북의 땅을 순수(巡狩)하면서

북한산과 함경도의 황초령,마운령에 비를 세웠다.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은 대개 비슷한 내용이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제왕은 왕위를 계승하고 스스로 삼가며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이 왔다.

 

 이에 관경(管境)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펴서

 백성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며

 충성과 신의를 갖추고 재주를 다해

 나라에 충절한 공을 세운 자가 있다면

 벼슬을 올려주고 공훈을 표창코자 한다.

 

 이때 왕의 수레를 따른 이는

 법장(法藏) 혜인(慧忍)등이었다."

 

 

문장은 대단히 유려하고, 글씨는 해서체로

질박하면서도 굳센 느낌을 준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는<광예주쌍집 廣藝舟雙輯>에서

역대의 서품(書品)을 논하면서 이 비를 신품(神品)의 반열에 넣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마모되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엉뚱하게도 무학대사비라는 전설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1816년, 당대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31세 때 벗 김경연과 함께 이 비를 탁본해 연구한 결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듬해에는

벗 조인영과 다시 확인하고서 이 사실을 비 측면에 기록해 두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지붕돌까지 갖춘 격식 있는 비석이었다.

 

2007년, 복제비를 세울 때 지붕돌의 깨진 조각이라도

수습하려고 샅샅이 조사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어딘가에 잔편이 있으리라는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나는 북한산에 갈 때마다 비봉 아래쪽을 서성이게 된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