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채병덕장군

백삼/이한백 2014. 8. 20. 11:33

@   

                                    陸軍 中將 蔡炳德 將軍애 대한 歷事/1950년 7월 27일 하동 전투에서 전사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 (34세에 경남 하동전투에서 전사)

 

일제시대에 출생해서 성장하고 또 관료나 군인, 기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신 분들중 출세하신 분들가운데 친일의혹을 벗어나기 어려운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서울 현충원 안장자 검색을 하다가 6.25전쟁중 경남 하동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신 채병덕 장군님(전사후 중장으로 추서) 을 찾아보니 사망일(전사일)이 1950년 7월 27일이여야 하는데 9월 27일로 되어 있네요.

 

전사자료들은 입력하는 과정에서 오타가 많이 나기 때문에 더러 오류가 많습니다.

 

 

 

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검색을 이용한 서비스화면

 

 

날이 밝으면 전화해서 오류를 바로 잡도록 해야 겠습니다.

이 외에도 더러 입력상의 오류가 잇어 바로 잡아야 할 것 입니다.

 

 

 

2대, 4대 육군참모총장 역임. 6.25 당시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일본식 이름: 大島秉? 오시마 헤이도쿠, 1916년 4월 17일 ~ 1950년 7월 27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위키백과)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6월 25일),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다음날(6월 26일) 오후의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8일 한강철교가 폭파되자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승만이 보는 앞에서 채병덕에게 한강방어선에 대해 지휘관으로서 어떻게 지휘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채병덕은 이에 대해 우물쭈물 거리며 허상에 젖은 답변을 했다.

 

맥아더는 채병덕이 보는 앞에서는 이승만에게 채병덕을 칭찬했으나 그날 저녁 맥아더는 바로 이승만과의 독대면을 요구하였고 이승만과의 독대면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채병덕의 경질을 요구했다. 결국 채병덕은 1950년 6월 30일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어 '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이란 직책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말이 사령관일 뿐 실제 채병덕에게 부여된 병력은 1개 대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64년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재심에서 채병덕이 실질적 책임자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맥아더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쿄에서 날아와 잠시 이승만을 만났을 때 채병덕의 해임을 건의했다고 한다. 사태 수습책을 묻는 맥아더의 질문에 채병덕이 200만 남한 청년들을 동원해 훈련시켜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답하자, 맥아더는 그 자리에선 칭찬한 뒤 이승만과 단둘이 있게 되자 바로 채병덕을 다른 사람으로 갈아치우라고 말했다.

 

 

1950년 7월 23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채병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

 

 

이 명령으로 채병덕은 남해안을 돌아 공격하여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인민군 6사단의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전사했다. (하동 전투) 훗날 채병덕 살해 음모가 제기되기도 했다. (위키백과)

 

장군의 묘비아래 묘비석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