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8세기 조선은 얼마나 가난했나? (중국/일본과 비교)|

백삼/이한백 2014. 8. 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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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중국의 비교


식생활

청나라 : 외진 마을의 가난한 집이라도 보통 여러 칸 크기의 광을 소유하고 있고 그 안에는 여러 가마니의 곡식을 저장하고 있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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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백성들 중 하루 2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집은 10가구 중 1~2가구에 불과하다.

구황작물로 비축해놓은 곡식이라곤 옥수수 몇자루와 마늘 수십개가 전부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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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수준

청나라 : 중국의 백성들은 대부분 비단옷을 입고 담요에서 잠을 자고 침상과 탁자를 구비해 놓고 산다.

농사꾼이라도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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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농부들은 1년에 무명옷 한벌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나서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살아간다.

아이들은 겨울에도 벌거숭이가 되기 일쑤고 신발도 신지 못한다. 한둘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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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수준

청나라 : 일반 백성이 사는 집들은 모두 하나 같이 크고 반듯한 벽돌로 지어졌다. (박지원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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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초가집이 대부분인 백성들의 집은 무너지기 쉽고 불에 타기 쉽다.

조선도 하루 빨리 벽돌을 널리 활용해야 될 것이다.

온돌의 경우 잘못된 설계 때문에 땔감의 낭비가 심하고 고루 따뜻하지 못하며 연기가 아궁이 밖으로 거꾸로 나오기 일쑤다. (박지원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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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생활

청나라 : 변방의 시골여자라도 얼굴에 분가루를 바르고 머리에는 꽃장식을 하고 긴옷에 수를 놓은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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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젊은 여자도 맨발로 다니기 일쑤요 그 행색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새옷이라도 걸치는 날에는 혹시 기생이 되지 않았나 의심부터 한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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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유통업 수준

청나라 : 아무리 변방 오지의 첩첩산중이라도 수레가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런 이유로 유통업이 발전하고 백성들은 재산이 풍족해질 수 있다. (박지원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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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경상도 사람들은 새우를 모르고 평안도 사람들은 감과 감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한다.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 정어리를 거름으로 줄 정도로 흔하지만 한양 사람들은 구경도 할 수도 없다.

이 모든 이유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박지원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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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의 발달 정도

청나라 : 중국은 도시와 시골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양자강 이남 오촉민월과 같은 외딴 시골 동네만 하더라도 번화한 도회지에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한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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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도성에서 몇 리 밖으로만 나가도 시골티가 물씬난다.

재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여 물자가 부족하고

학문은 과거시험만을 위해 존재하고 일반 백성들은 견문을 넓힐 방도가 전혀 없고 재능을 발견하고 식견을 트이게 할수도 없다. (박제가 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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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의 비교 : 조선 통신사, 김인겸의 저서 '일동장유가'


1764년 1월 22일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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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채는 있다고 생각되는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굉장하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의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사치스러움은 비정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40 km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의 10000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2천년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1764년 1월 28일 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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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도에 있어서는 오사카에는 미치지 않는다.

그래도 왜왕이 사는 수도로서 매우 사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산의 모습은 장엄하고 강은 평야를 둘러싸고 흐르고 비옥한 농지가 광할하게 퍼져 있다.

이 풍부한 낙원을 왜인이 소유하고 있다.

분하다.

분하다.

이 개와 같은 왜인을 모두 소탕하고 싶다.

이 토지를 조선의 영토로 하고, 조선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



1764년 2월 3일 나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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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번영, 아름다움은 오사카와 같다.

굉장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인구가 많음, 토지의 풍부함, 가옥의 사치스러움 등은

중국의 중심지에도 없는 풍경이다.

사람들의 용모도 아름답다.

특히 여성이 아름답다.

나고야의 미인이 길을 걷는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 일원은 나고야의 미인을 한 명도 놓칠세라 머리를 좌우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1764년 2월 16일 에도(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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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는 집이 줄지어 있고 우측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비옥한 토지가 광할하게 퍼지고 있다.

누각이나 저택의 사치스러움, 사람들의 활기참, 남녀의 화려함, 성벽의 아름다움, 교량과 배

모두가 오사카와 같이 뛰어나다.

이 훌륭함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나고야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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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당시 청나라, 일본을 다녀온 실학자와 수신사들이 쓴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