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백삼/이한백 2014. 8. 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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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그리스 크레타섬 칸디아 출생이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Domenikos Theotokopoulos)인데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그레코로 통칭된다.   베네치아에서 V.티치아노의 지도를 받고, 틴토레토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정확한 자연묘사를 하였고, 베네치아풍의 색채법을 사용하여 황금조 (黃金調)가 아닌 흑회색(黑灰色)이 눈에 띈다.   대부분이 종교화와 초상화 였지만 깊은 명암과 색채,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인체묘사로 에스파냐  신비주의를 대표한다.  
사후 오랫동안 그 진가가 망각 되었으나,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P.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 [오루가스 백작의 매장](1586),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그리스도의 세례]를 비롯한 많은 초상화가 있으며,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에스코리알궁, 톨레도의 미술관과 여러 교회에 훌륭한 컬렉션이 있다.

엘 그레코(El Greco)는 혁명아다.  그의 작품이 혁명적인 만큼 그의 삶도 혁명적이었다.  서양미술사를 장식한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미술사가들은 16세기 후반에 활약한 엘 그레코부터 찾는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베니스화파에 속했지만, 절정기 무렵의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은 현대 추상회화에서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심하게 일그러지거나 뒤틀려 있다.  
그의 눈이 심한 난시였거나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시각적 장애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될 정도로 그의 화면은 16세기 때 이미 20세기 추상을 예고하며 심하게 왜곡되고 또 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400년이나 앞서가던 사람의 생애 또한 금세기 후반에 나타난 히피의 삶을 연상케 한다.

엘 그레코의 회화들은 자연적 형태나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면서 감동적인 극적 환상을 창조하고 있다.   당시 매너리즘 양식이 보여주는 전문적 기교들을 모두 제거시켰으며 단지 기이하게 길게 그린 비구성적인 인물들만이 그의 회화 속에 살아 남았다. 
가시적인 세계와 감정의 세계가 혼합되고, 또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회화 기법은 19세기 후반 많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16세기 회화에서는 파격적이며 놀라운 것이었다.

16세기의 엘 그레코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17세기의 벨라스케스, 18세기의 고야와 함께 3대 거장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스페인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36세 때인 1577년에 정착하여 1614년 7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오래도록 살아왔던 스페인 마드리드 남쪽의 고도 ‘톨레도’의 모든 것은 엘 그레코로 통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는 톨레도와 한몸으로 일체화 되어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그만큼이나 현대적이지만 당시로는 너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미래적이었다.

엘 그레코와 같은 천재 앞에서는 시간은 때로 성수대교처럼 무너지는가 하면 때로는 남대천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흐름에 역행하기도 한다.

<톨레도 풍경>은 인물 형상이 없어서 표현력이 더욱 큰 것 같습니다. 엘 그레코가 이미 이전 그림들의 배경으로 여러 번 사용한 (예를 들면 암스텔담 왕립 박물관 소장의 <십자가에 고통받는 예수> 1585-90) 이 모티브를 독립된 풍경화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 풍경의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짙은 먹구름 아래에서 번개 빛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음산한 언덕과 건물들, 빛의 흐름만이 번쩍이는 검은 하늘은 거의 추상화 같습니다. 중세 종교화가 지닌 영적인 힘과 현대의 추상회화가 만난 듯한 표현력이지요. 

사도 안드레아 1606, 캔버스유화, 97 x 77, 톨레도 그레코 박물관

 

-안드레아는 베드로의 형제이며 어부였습니다. 아가야 지방의 파트레에서 십자가에 달린것으로 알려지며 십자가형을 받았을 때 감히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를 질 수 없다며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크레타 출신으로 스페인에서는 그냥 '그리스인'으로 불렸던 이 마니에리스모의 거장. 그는 이 그림이 아직도 걸려 있는 장소, 즉 톨레도의 산토 토메 성당에서 일어났던 어떤 기적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교회의 후원자였던 돈 곤잘로 루이스를 매장할 때, 스테파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이 두 서자가 나타나 친히 백작의 사체를 입관했다 한다.

화면은 크게 위 아래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단을 실제 이루어지고 있는 매장 의식. 상단은 백작의 영혼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상상'을 보여준다. 천사 하나가 구름 사이의 비좁은 틈으로 백작의 영혼을 밀어넣는다.

하단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의식의 현실, 하나는 기적의 환영이다. 저 놀라운 사건은 세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기적을 보는 것은 오직 두 사람, 성자들 바로 왼쪽의 어린아이와 그 반대편에 등을 돌리고 있는 신부뿐이다. 아이는 그림 밖의 관람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으로 이적의 현장을 가리키고, 신부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놀라 두 팔을 벌린 채 놀라운 은총을 내려준 하늘을 바라본다.

당시 사람들은 엘 그레코를 '영혼을 보는 자'라 불렀다. 세인의 눈에 이상하게 비친 엘 그레코의 광기(?)는 아마도 그가 로마로 간 1570년과 톨레도에 나타난 1577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게다. 그 7년 사이의 행적은 묘연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의 스타일이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만은 분명하다. 대체 로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미켈란젤로였다. 이 거장이 말년에 제작한 작품들은 당시 비평가들의 이해력을 넘어섰다. 르네상스의 자연주의를 고집하던 비평가들의 눈에 그것들은 그저 '미완성', '노망기'로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 1488년에 제작된 바티칸이 <피에타>, 1550년에 제작된 피렌체의 <피에타>, 그리고 1564년에 제작된 <론다니니 피에타>를 비교해보면, 르네상스 예술의 격률인 '자연의 모방과 형식의 이상화'가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하는 제롬 작품입니다.(대비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같이 올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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