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상의 역사산책 43]윤치호 VS 독립운동가 김가진 가문의 엇갈린 운명
◈ 한국 최고의 명문가 '윤치호 가문'...친일파 7명이나 배출하다
1960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윤치호 일가의 인물들이 경무대에 모여 이렇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일선(서울대 총장), 치영(국회 부의장), 보선(대통령), 치왕(육군 의무감), 치창(주영공사), 영선(농림부장관) 등이다.
정말 휘황찬란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집안의 인물 중 7명이나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는 아들 셋을 뒀는데, 장남이 중추원 고문을 지낸 치호, 차남은 영국 글래스고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 병원장을 역임한 치왕, 셋째는 미국 시카고대를 졸업하고 초대 주영대사와 터키 대사 등을 지낸 치창이다.
윤웅렬의 동생인 영렬은 6남 3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4명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손자를 포함하면 모두 5명에 달한다.
큰 아들 치오와 둘째 치소는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찬의와 참의를 지냈다.
치오의 장남인 일선은 서울대 총장을, 차남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간도성 차장을 역임했다.
둘째 치소의 장남이 대한민국의 두번째 대통령인 윤보선이다.
3남인 치성은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기병 중좌(중령에 해당)로 있었다.
6남 치영은 일제 말기에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 등을 지내면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벌였고, 해방후에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서울시장과 민주공화당 의장에 올랐다.
"친일하면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망한다"는 세간의 속설을 이 집안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친일로 흐른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윤치호
윤치호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지낸 개화. 계몽주의자의 핵심 인물이었고, 한국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운동의 지도자였다.
그가 점차 친일로 흐르는 과정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쓴 일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이 일기장을 읽어보고 감화 감동을 받아 공개석상에서 윤치호의 친일행각을 적극 옹호한 것으로 추정된다.
첫번째가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 민족주의자의 씨를 말리려고 벌인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일이다.
그는 전향을 조건으로 다음과 같이 전향의 변을 발표하고 풀려난다.
"우리 조선민족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이후에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해서 양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나 동화에 대한 계획에 참여해 힘이 미치는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
3.1운동까지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며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 일으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갑부였던 그는 수시로 총독부나 일본 군경에게 기부금을 갖다 바치면서 독립운동 군자금은 죽는 날까지 십원 한장 내지 않았다.
이런 행각을 벌이는 것은 조선시대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조선인들의 민족성이 열등하다고 믿는 시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조선을 무시하고, 미국과 영국은 존경하면서도 시기심을 갖고 있었고, 날로 영토를 넓혀가는 일본을 경외했다.
그러다 급기야 일본이 만주에 이어 중국을 침공한 데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적극적인 친일에 나선다.
강연회와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내선일체만인 살 길'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급기야는 총독부의 제의를 받아들여 중추원 고문에 취임한데 이어 일제가 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에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임됐다.
해방과 함께 제일 먼저 반민특위 체포될 운명이었던 윤치호는 일제가 물러선 직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일기장에서 그의 생각을 집약한 것은 다음과 같은 고백이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정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 70대의 조선 말 대신 출신 '동농 김가진' 조선독립을 위해 망명하다
그는 조선이 망하자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느낀 그는 1919년 10월 3남 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이어 국내 조직과 연계해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아쉽게 실패한다.
일제는 상해임시정부를 '사회 하층민들이 만든 대수롭지 않은 모임'이라고 선전했으나, 고관대작 김가진의 망명에 이어 황족의 망명 미수 사건은 일제와 조선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저마다 애국자라고 떠들던 조선의 고관대작 가운데 외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이는 김가진 한 명밖에 없다.
아들 의한도 해방이 될 때까지 상해 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아 일했다.
뒤늦게 시아버지, 남편과 합류한 아내 정정화도 군자금 마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여섯번이나 국내에 잠입하는 등 '상해임정의 안살림꾼'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향년 77세였다.
문창극 후보자가 흠모하던 윤치호와는 다른 인생을 산 것이다.
7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의 장례와 추도식을 성대하고 치르고 시자후이 만국공묘에 안장했다.
해방 후 정정화는 후손들에게 "사실상 굶어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2년 9개월의 망명생활이 어려웠다는 얘기다.
동농 김가진은 떠났어도 후손들은 유지를 받들어 맑은 삶을 살았다.
4남 용한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김상옥 열사 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 아들 석동은 큰 아버지 김의한이 있는 중국으로 건너가 최연소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일제가 76명의 고관대작들에게 준 남작 작위를 거절하지 못했다는 이유다.
그의 유해는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기에 파괴돼 찾을 길이 없다.
친일파를 여럿 배출한 윤치호 일가와 달리 김가진 일가는 4대에 걸쳐 민족사랑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상 독보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동농 김가진 선생의 가문은 이회영-이시영 가문과 더불어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다.
1960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윤치호 일가의 인물들이 경무대에 모여 이렇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일선(서울대 총장), 치영(국회 부의장), 보선(대통령), 치왕(육군 의무감), 치창(주영공사), 영선(농림부장관) 등이다.
정말 휘황찬란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집안의 인물 중 7명이나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윤치호 가문의 가계도. 권력과 재력을 독점하고, 일본에게도 도움을 많이 줬다.(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조선 말기에 군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낸 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그는 아들 셋을 뒀는데, 장남이 중추원 고문을 지낸 치호, 차남은 영국 글래스고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 병원장을 역임한 치왕, 셋째는 미국 시카고대를 졸업하고 초대 주영대사와 터키 대사 등을 지낸 치창이다.
윤웅렬의 동생인 영렬은 6남 3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4명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손자를 포함하면 모두 5명에 달한다.
큰 아들 치오와 둘째 치소는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찬의와 참의를 지냈다.
치오의 장남인 일선은 서울대 총장을, 차남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간도성 차장을 역임했다.
둘째 치소의 장남이 대한민국의 두번째 대통령인 윤보선이다.
3남인 치성은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기병 중좌(중령에 해당)로 있었다.
6남 치영은 일제 말기에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 등을 지내면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벌였고, 해방후에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서울시장과 민주공화당 의장에 올랐다.
"친일하면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망한다"는 세간의 속설을 이 집안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친일로 흐른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윤치호
윤치호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지낸 개화. 계몽주의자의 핵심 인물이었고, 한국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운동의 지도자였다.
그가 점차 친일로 흐르는 과정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쓴 일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이 일기장을 읽어보고 감화 감동을 받아 공개석상에서 윤치호의 친일행각을 적극 옹호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치호가 영어로 쓴 친필 일기 원본의 일부와 미국 에머리 대학에 유학 중이던 20대 후반의 윤치호.
일기장에 드러난 그의 행각을 보면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저항하던 윤치호가 점차 친일로 달려가는 계기가 두번 나타난다. 첫번째가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 민족주의자의 씨를 말리려고 벌인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일이다.
그는 전향을 조건으로 다음과 같이 전향의 변을 발표하고 풀려난다.
"우리 조선민족은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이후에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해서 양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나 동화에 대한 계획에 참여해 힘이 미치는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
105인 사건 당시 주모자들이 재판을 마치고 감옥으로 호송되는 장면이다.
이때부터 윤치호는 일제가 망할 때까지 어떤 형태의 독립운동도 반대했다. 3.1운동까지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며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 일으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갑부였던 그는 수시로 총독부나 일본 군경에게 기부금을 갖다 바치면서 독립운동 군자금은 죽는 날까지 십원 한장 내지 않았다.
이런 행각을 벌이는 것은 조선시대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조선인들의 민족성이 열등하다고 믿는 시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조선을 무시하고, 미국과 영국은 존경하면서도 시기심을 갖고 있었고, 날로 영토를 넓혀가는 일본을 경외했다.
그러다 급기야 일본이 만주에 이어 중국을 침공한 데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적극적인 친일에 나선다.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어머니와 3딸과 함께 한 윤치호.
그는 YMCA와 감리교의 '일본화' 작업을 주도하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지원병후원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대표적인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참여했다. 강연회와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내선일체만인 살 길'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급기야는 총독부의 제의를 받아들여 중추원 고문에 취임한데 이어 일제가 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에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임됐다.
해방과 함께 제일 먼저 반민특위 체포될 운명이었던 윤치호는 일제가 물러선 직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일기장에서 그의 생각을 집약한 것은 다음과 같은 고백이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정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 70대의 조선 말 대신 출신 '동농 김가진' 조선독립을 위해 망명하다
말년의 동농 김가진 (사진=역사공간 제공)
김가진은 조선 말에 공조판서,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 의장, 충청남도 관찰사, 규장각 제학을 지낸 안동 김씨 가문의 대표적인 고관이었다. 그는 조선이 망하자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국내에서 활동의 한계를 느낀 그는 1919년 10월 3남 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이어 국내 조직과 연계해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아쉽게 실패한다.
일제는 상해임시정부를 '사회 하층민들이 만든 대수롭지 않은 모임'이라고 선전했으나, 고관대작 김가진의 망명에 이어 황족의 망명 미수 사건은 일제와 조선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저마다 애국자라고 떠들던 조선의 고관대작 가운데 외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이는 김가진 한 명밖에 없다.
아들 의한도 해방이 될 때까지 상해 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아 일했다.
뒤늦게 시아버지, 남편과 합류한 아내 정정화도 군자금 마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여섯번이나 국내에 잠입하는 등 '상해임정의 안살림꾼'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해방 후 귀국 1주년에 찍은 가족 사진. 뒤에 서있는 외아들 후동은 보성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사진=역사공간 제공)
노구를 이끌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김가진은 1922년 7월 4일 이국에서 순국했다. 향년 77세였다.
문창극 후보자가 흠모하던 윤치호와는 다른 인생을 산 것이다.
7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의 장례와 추도식을 성대하고 치르고 시자후이 만국공묘에 안장했다.
해방 후 정정화는 후손들에게 "사실상 굶어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2년 9개월의 망명생활이 어려웠다는 얘기다.
동농 김가진은 떠났어도 후손들은 유지를 받들어 맑은 삶을 살았다.
4남 용한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김상옥 열사 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 아들 석동은 큰 아버지 김의한이 있는 중국으로 건너가 최연소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동농 김가진의 가계도. 휘황찬란한 윤치호 집안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가진은 후손으로 3명의 독립운동가를 남겼지만 정작 본인은 심사에서 탈락됐다. 일제가 76명의 고관대작들에게 준 남작 작위를 거절하지 못했다는 이유다.
그의 유해는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기에 파괴돼 찾을 길이 없다.
친일파를 여럿 배출한 윤치호 일가와 달리 김가진 일가는 4대에 걸쳐 민족사랑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상 독보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동농 김가진 선생의 가문은 이회영-이시영 가문과 더불어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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