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고흐의 눈빛, 그들에게로

백삼/이한백 2014. 3. 19. 19:37

고흐의 눈빛, 그들에게로

Vincent Van Gogh

 (1853-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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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그를 만나지 못 할 뻔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다가 전시회 막바지에야 고흐 전시회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녘에 미술관에 도착하였으나, 그냥 되돌아갔던 지난번처럼 여전히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고흐의 작품을 대하면서 먼저 놀라며 확인한 것은 큰 규모의 작품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 동생인 테오의 도움으로 어렵게 그림을 그렸던 고흐에게 큰 캔버스를 살 돈도, 그 캔버스를 채울 물감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연민으로 호흡했던 사람들의 처지마냥 작은 사이즈의 그림이 더 잘 어울렸을 법하다. 그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그의 그림의 사이즈 또한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대작을 만드는 사람은 뒷돈을 대줄 수 있는 뒷배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화 작품들은 익히 들었던 대로 과연 살아서 생생함을 돋보이고 있었다. 사람뿐 아니라 풀잎과 흙덩이까지 살아서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영원으로 가는 통로, 별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동생인 테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자신의 심경과 작품에 대한 의견 등을 비롯하여 한 몸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후기 작품에 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고흐의 종교적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고흐가 마음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밀레 역시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먼저 그렸으며, 고흐는 월트 휘트먼에게도 영감을 받았다.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엔 이렇게 적혀있다.


“미국 시인 휘트먼의 시들을 읽어보았니? 그는 미래에서, 아니 현재에서도, 건강하고 인간적이며 강렬하고 솔직한 사랑과 우정, 노동이 존재하는 이 세상 위로 펼쳐진 별빛 비치는 커다란 둥근 하늘을 본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며, 이 세상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영원이다.”


고흐는 평범한 사물 속에 육화된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심각한 어려움이 닥쳐올 때면 무한으로 가는 통로인 별이 가득 찬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종교적 갈망을 담은 <별이 빛나는 밤>에서, 고흐는 자신이 상상력을 끝까지 팽팽하게 펼쳐 가장 음악적인 작품을 창조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또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자신의 시선을 내려놓아 <신발 만드는 사람> 등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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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별이 빛나는 밤


헨리 나웬과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를 보러가기 전에 우연히 추천받은 책이 한 권 있었다. 클리프 에드워즈가 쓴 <하느님의 구두>라는 책이다. 그는 제목에 ‘거룩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고 적었다. 그의 영성을 탐구한 책이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하면서 도움을 받은 사람은 헨리 나웬이었다. 저명한 대학교수를 버리고 급기야 새벽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비로소 참된 하느님 체험을 하였다는 영성가다. 나웬은 고흐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흐의 고독한 투쟁과 나의 고뇌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했으며, 그가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전에 내가 감히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그렸고, 내가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것에 물음을 던졌으며, 내가 감히 근접할 수 없었던 마음의 자리에 성큼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나로 하여금 나의 두려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고,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더욱 깊이 또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사람들은 흔히 빈센트 반 고흐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예술을 창조해 낸 불운의 천재로 여기고, 쉽게 고뇌와 불행과 정신병을 떠올린다. 그러나 고흐는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했고, 세익스피어와 디킨스, 졸라를 읽었으며, 연민의 마음으로 서민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예술을 구축하고 자신을 불살랐다.


클리프 에드워즈는 먼저 창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창문은 우리가 속한 공간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창문은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내부 공간을 밝혀줄 빛을 들여오기도 한다. 그림은 창문과 같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가로막힌 벽 대신에 산과 들을 바라보고 우리 영혼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빛을 들여온다.” 독일 신비가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내가 하느님을 보는 바로 그 눈이 하느님께서 나를 보시는 눈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림은 화가가 하느님의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며, 또한 하느님이 화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기도 하다. 그럼 과연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고흐의 눈빛은 어떤 색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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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비판, 자유롭게-가난한 이에게


고흐의 초기 생애는 줄곧 성직자가 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와 라틴어 그리고 대학입학을 위한 예비과목인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벨기에의 한 복음교회 학교에 자원하기도 했으며, 가족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아 벨기에의 가난한 탄광촌 보리나주에 수습선교사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는 수습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면직당했다. 그가 보리나주의 광부들을 경험하면서 제가 소유한 바를 다 나눠주고, 그들과 똑같은 움막에 살며 그곳에서 예배를 보았기 때문이다. 광부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절망에 동참하며 그들 안에서 빛나는 하느님을 발견하려던 고흐는 교계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목회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이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엔 엄격한 종교에 대한 비판이 서려있다.


“복음전도사들도 예술가들과 같다고 말해야겠구나. 혐오스럽고 고압적인 오래된 학교가 있고, 공포가 가득하며, 편견과 관습의 철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지. 이런 자들이 책임을 맡게 되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직위를 관리하고, 딱딱한 형식주의를 내세워 자기 신자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나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필이었다. 잿빛으로 뿌옇게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을 연필로 그려서 존재감의 옷을 입혀 주는 것이었다. 고흐는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그들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무시하고 잊고 지내는 이 일꾼들의 얼굴을 ‘사람들 눈앞에’ 데려와 사람들에게 이 연약하고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의무를 일깨워 주고 싶었다. 이렇게 고흐는 가장 소박한 사람들, 나무, 풀, 길 그리고 이런 풍경들이 그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내면의 빛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길을 찾았다. 그는 일상을 사는 농부들과 광부들과 우체부와 엄마와 아이들을 둘러싼 세계를 떠나서 하느님을 만날 길이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앞에서 관념적인 설교는 힘을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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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성경


고흐가 탄광촌에서 나온 뒤 얼마 후 시골 목사로 있던 엄격한 아버지가 죽자, 탁자 위에 성경책과 졸라의 소설이 놓여 있는 정물화를 화폭에 담아서 아버지의 죽음을 기렸다. 그러나 이 그림은 고루하고 염세적인 아버지의 신학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그림엔 오른쪽 면 맨 위에 ‘ISAIE'라는 글자가, 그 오른쪽 여백엔 ’LIII'라고 적혀 있는데, 이사야서 53장의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았을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란 책이 성경책 근처에 놓여 있다. 때때로 아버지에게서 ‘더러운 짐승’처럼 취급받았던 고흐의 자유로운 정신과 상처받는 치유자에 대한 갈망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의식적으로 개의 길을 기꺼이 선택한다고 말해 두마. 나는 개로 남을 테다. 가난하게, 화가로.”


고흐는 당시 고루한 늙은 신사와 같은 교계에서 내침을 당하고, 세상에서도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 평생을 살았고, 죽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로,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이사야 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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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슬픔


슬픔, 여인과 아기, 어둠 속의 빛


스물일곱 살 이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불과 십년 후인 서른일곱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흐는 그림을 그렸다. 그가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의 창조적 예술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결코 직업적 화가가 되려고 한 것 같지 않다. 그림을 통해 자기 자신과 가련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흐의 삶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는 헤이그에서 매춘부였던 크리스틴(시엔이라고도 함)을 만난 것이다. 고흐는 죽어가던 그녀를 무료진료소에 데리고 가서 입원시켰고, 그녀는 거기서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였다. 고흐는 여인과 아기를 작업실로 데려와 요람을 마련하고 위에 렘브란트의 판화를 걸어놓았는데, 이렇게 고백한다. “새 작업실은 한창 피어나는 새로운 가정이다. 신비롭고 은밀한 작업실이 아니라 요람과 아기 변기 의자가 있는 실제 삶에 뿌리를 내린 공간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정체됨이 없고 모든 것이 다 활기차게 움직인다.”


고흐에게 아기는 ‘어둠 속의 빛’이었고, 하느님이 우리의 보살핌과 희생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고흐가 아기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탄생하는 하느님으로 인식한 것은, 고난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깊은 경험이었다. 고흐에게 하느님은 아기처럼,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들판처럼 우리에게 생생하게 오신다. 물론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흐의 집안에서 반대하고, 크리스틴의 가족들은 그녀를 다시 거리로 내몰았다.   


고흐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다. 사랑이든 일이든 모든 것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언젠가 동료작가가 삶의 신조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이렇게 답했다. “침묵하고 싶지만 꼭 말을 해야 한다면 이런 걸세.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 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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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성인들의 초상


고흐가 그린 초상화에는 거창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초기작인 연필 드로잉이든 나중에 그리기 시작한 유화이든 광부와 우편배달부, 농부들과 일하는 여인들, 아이를 돌보는 엄마들의 표정을 그림에 담았다. 고흐는 평범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통해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달 수입이 150프랑 밖에 안 되는 친구이며 우편배달부였던 조세를 그리고, 그의 아내 오귀스틴을 그렸다. 남편 조세는 성격이 화통하고 친절했으며, 교회를 비롯한 제도를 못 견뎌했다고 한다. 1888년 가을, 그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테오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자.


“그림을 통해서 나는 음악처럼 위안이 되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 나는 후광으로 상징되던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빛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참된 광채와 떨림으로 전하고자 하는 그런 영원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을 그리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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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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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룰랭의 부인 오귀스틴의 초상 


오귀스틴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고흐는 그녀를 몇 번이고 그렸고, 이 초상화를 제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스러운 장면들과 성인들을 담은 3부작의 중심에 두려고 했다. 그는 해바라기 그림들을 그녀의 초상화 양쪽에 ‘장식촛대’처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고흐는 자신이 자기 일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릴 지 가늠해 본적 있었다. 아마 6년에서 10년 정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고흐는 27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37살에 이승을 떠날 때까지 딱 10년 동안 열정적으로 그림에 몰두하였다. 그는 말한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나는 아주 차분하고 평온하게, 가능한 한 규칙적이고 안정되게, 또 가능한 한 간결하고 정확하게 작업을 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어떤 빚과 책임을 지고 있음을 깨닫는 그만큼 세상은 나에게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땅을 30년 동안 걸어왔고,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그림을 통해 세상에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적 취향을 만족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들판에서 들려온 언어를 그림으로 옮기며


고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면 들판에 나가 흠뻑 비를 맞으며 하느님의 위대한 경이로움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생생하게 깨어있게 하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거센 비바람은 또한 인간의 슬픔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이기도 했다. 클리프 에드워즈는 고흐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머리에는 태양을, 가슴에는 폭풍우를 품고 살았다. 그는 광부와 농부들을 그렸고, 여염집 아낙네와 엉겅퀴에서 성인들을 발견했고, 마지막에는 밀밭과 까마귀와 폭풍우 치는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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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고흐가 바라보았던 들판이란 한편엔 폭풍우 치는 하늘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한층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밀밭이 있다. 이 곡식들은 빵을 만들 밀과 다시 심을 씨앗을 약속한다고 보았다. 고흐는 평생 자신이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화가에게는 재주가 아니라 자연의 언어를 읽는 능력이 더 필요했다.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어떻게 보면, 그림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 다행스럽구나 ... 그러나 나는 내 그림에서 언젠가 내 마음을 치고 지나갔던 울림을 발견한다. 자연이 나에게 무언가 말해왔고, 말을 걸어왔으며, 나는 그것을 재빨리 받아 적어 화폭에 옮겨 놓았음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받아 적는 가운데 해독할 수 없는 말들도 있고 오타나 누락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숲이나 바닷가나 인물이 나에게 말한 것을 조금은 그 안에 담고 있으며, 그것은 학습이나 체계에서 이끌어낸 따분하고 진부한 언어가 아닌 자연 그 자체에서 온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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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양귀비가 있는 들판

 

고흐는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자연에 대한 세심한 감각과 자신의 처지에서 온 어려움과 외로움 때문에 더욱 자연에 깊이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끈질긴 경청과 세심한 양육적 태도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양육적 태도로 대지와 여성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사랑하던 밀레나 들라크루아처럼 화가들이란 이러한 ‘아름다운 차분함’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보자. 여기에는 그가 이상으로 여겼던 예술가의 초상이 드러난다.


“여자들처럼 주의 깊고, 섬세하고, 지적이며, 자신의 고통에 민감함은 물론 생명력과 자기인식이 충만하고, 무관심한 냉철함은 보이지 않고 생명을 경시하지도 않은 그들은 세상을 떠날 때에도 여자들과 같은 모습이다. 하느님에 대한 틀에 박힌 생각이나 추상적인 것을 피하고, 언제나 삶 자체에 탄탄하게 발붙이고 거기에만 신경을 썼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사랑이 충만했고 삶에 상처를 받았던 여자들처럼 죽는다. 실베스트르가 들라크루아에 대해 말했듯이 ‘그들은 미소 띤 듯한 얼굴로 죽는’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기다린다, 언제까지나


1880년, 고흐가 그림을 배우기 위해 처음 연필을 들었을 때,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우리 내면의 생각이 밖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내 영혼 안에는 거대한 불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도 그 불을 쬐러 오지는 않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굴뚝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연기밖에 볼 수 없는지라 그냥 제 갈 길을 가지.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땀 흘리며 자기 안의 불을 보살피면서 누가 와서 불가에 앉아서 머무르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하겠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시간이 언젠가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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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고흐의 그림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평생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 밖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말년을 창살로 막혀 있는 정신요양원에서 보냈으며, 그렇게 죽었다. 지금 서울의 미술관에 밀려드는 수많은 관람객을 생각해 볼 때 묘한 느낌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흐는 화가이기 전에 어쩜 그 시대의 불우한, 그러나 빛나는 영혼을 가진 성직자(聖職者)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던 이들과 창조세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오늘은 결국 고흐를 만났다. 서책에서 보던 그 사람 말고, 그의 기운이 아직도 생생한 그림 속에서 그를 만났다. 그림을 보고 나오는 길목에 정동 제일교회가 바로 눈에 띄었다. 나는 무엇으로 그분에게로 건너갈 것이며, 어떻게 그분이 사랑하던 이들과 세계를 향해 발음해야 할까? 내 눈빛을 내가 가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