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비빔밥
진주비빔밥(七寶花飯)에 대하여
- 출처 : 진주비빔밥 칠보화반 이야기./정계임 著/비로문화
1. 비빔밥의 어원(語原)
시의전서(是議全書, 1800년대)에서는 부뷤밥이라고 하였으며, 중국의 골동반(汨董飯)에서 유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에는 반지골동(飯之骨董)이라는 표현과 함께 밥의 골동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비빈다.’는 국어학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섞어 밥, 섞는 밥’이라는 의미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의견이 많은데 이는 단순히 섞어서 먹는 밥이라면 ‘섞어 밥’ 또는 ‘섞은 밥’이라고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을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비비다의 뜻이 ① 두 물체를 맞대어 문지르다.② 어떤 재료에 다른 재료를 넣어 한데 버무리다.라고 표현함을 본다면 제사문화에서 시작된 음복(飮福)음식설로서 민족 최고(最古)의 음식, 복을 받던 밥이란 의미의 비빔밥이라는 주장도 있다.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부뷤밥(1917년 이후에는 부빔밥으로 표기)의 조리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을 정리하면 “밥을 정히 짓고 고기를 재워서 볶아 넣고 간갑을 부쳐서 썬 다음 각색 나물을 볶아 넣고, 좋은 다시마튀각을 튀여 부셔 넣은 후 고춧가루, 깨소금, 기름을 많이 넣고 비비어 그릇에 담아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달걀을 부쳐 골패짝 만큼 썰어 놓고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서 잘 재워 구슬 만치 부뷔여 밀가루를 약간 묻힌 다음 계란을 씌워 부쳐 얹고, 부뷤밥상에 장국을 잡탕밥으로 하여 놓은 것”이라 한다.
비빔밥의 어원은 이처럼 여러 설이 있으나, 한국 고유의 음식임을 고려할 때 제사문화에서 시작된 제사를 지낸 후 복을 빌기 위하여 갖가지 음식을 함께 넣어 버무리며 복을 비는 음복(飮福) 음식설을 가장 유력하게 보고 있다.
2. 한국기생(韓國妓生)의 원류(原流)
기생이란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의 계급에 속하였지만 예능뿐만 아니라 선비들 못지않은 교양과 학문을 갖추고 있었으며, 유교적(儒敎的) 신분질서와 남존여비(男尊女卑)에 젖어 있는 조선시대에도 선비들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기녀(妓女)의 등장은 고려 초기 각종 연회나 가례(嘉禮) 등의 행사를 벌일 때 기예(技藝)에 띄어난 관기(官妓)로 쓰면서 기녀(妓女)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 기녀의 원류(原流)는 고대 신라 초기의 원화(源花)집단에 소속된 유화(遊花)에서 유래한다. 화랑(花郞)안에 원화(源花)라는 여성 집단과 선화(仙花)라는 남성 집단이 있으며, 원화(源花)조직에서 여자아이를 뽑아 신정(神政)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하였는데 이를 유화(遊花)라고 하였다.
화랑(花郞)안의 남자들은 자연을 즐기며 심신을 단련하고 무예를 닦았는데 이들을 낭도(郎徒)라 하였고, 그 지도자가 선화(仙花)라 하였다. 하지만 원화의 권력이 선화보다 컸으므로 원화자리를 놓고 세력 간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이후 불교를 국교로 만들었던 법흥왕 말기에 원화제도를 폐지시키고 선화(仙花) 중심의 화랑으로 개편하며 진흥왕 원년에 풍월주 중심으로 유지되던 화랑 역시 왕권 강화 차원에서 폐지되어 신정(神政)속의 화랑은 국가조직으로 편입되면서 무예와 학문을 닦는 집단으로 재편성 되어 신라의 핵심세력을 기르는 인재양성 기구로 존속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자인 유화(遊花)들은 신당(神堂)을 지키는 예식의 일과 춤과 음악을 익혀 궁중의 행사를 위한 왕실 연예인으로 전락하게 되어 궁궐에서도 밀려나는 운명을 맡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기거하는 처소(處所)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기방(妓房)이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유화(遊花)가 기생의 원류(原流)인 셈이다.
고려시대에 교방청(敎坊廳)을 두어 관기(官妓)를 교육하였고, 조선시대에는 교방청을 서울과 평양, 진주에 지방 교방청을 두어 가무나 서화 등을 가르쳤는데 조선의 선비들이 기생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교방의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개상 중에는 황진이(黃眞伊)뿐만 아니라 매창(梅窓), 소백주(小伯舟) 등과 같은 명기(名妓)가 있는가 하면,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진주의 논개(論介), 한양의 홍련(紅蓮) 등과 같은 의기(義妓)로 유명한 기생들도 있다.
여기서 기생을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진주비빔밥의 전형인 칠보화반(七寶花飯)이 진주 기생들의 각고의 노력과 전통으로 유전(遺傳)되어 왔기 때문이다.
3. 칠보화반(七寶花飯) 진주비빔밥에 얽힌 이야기 - 진주성 전투
진주성 전투의 기적에는 비빔밥이 있다. 호남점령의 교두보로 중요한 진주성 싸움에서 3천~4천명의 병력으로 3만이 넘는 일본의 대군을 격퇴한 힘에는 진주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있었다. 1차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의 적의 유탄에 목숨을 잃었지만 군사들은 6일 동안의 막강 화력에도 꿈쩍 않고 버티면서 일본군 배후에서 기습전, 시위전을 벌이니 일본군은 결국 퇴각하고 만다. 이 싸움이 임란 3대첩 중의 하나로 불리는 진주성 대첩이다. 여기서 군과 백성이 똘똘 뭉치게 된 이유에는 전장 시작전에 제천의식으로 승전을 빌고 사람과 하늘이 함께 나누어 먹었던 비빔밥이었다. 이는 결국 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발휘되었다. 2차 전투에는 군사 6천명이 왜군 7만명과의 대전이었음에도 일주일이 넘도록 성을 공략하였지만 공략을 못하였는데 불운하게도 장마철 장대비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9일이 되는 날에 성을 함락당하고 만다. 하지만 물밑 듯이 밀려드는 왜병에 쉽게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정항으로 죽음을 선택하였고 패전으로 끝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주 기생의 조직적인 계획에 의하여 논개의 왜장 테러사건으로 결국 왜군은 술자리에 있었던 진주기생을 무차별 도륙하고 성안에 있던 양민들도 무차별 살육을 한 다음 우물을 메우고 진주성을 빠져 나갔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星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성안에 들어온 왜병은 민군 사망 6만여명, 소·말·닭·개 등을 남기지 않고 죽였으며, 해자와 우물을 메우고 나무들도 모두 잘라버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칠보(七寶)란 단순히 일곱가지 보석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상징하는 낱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2차 전투에 앞서 지휘부는 1차 전투 때처럼 백성의 협조를 이끌기 위하여 민관군이 함께하는 천제(天祭)를 준비하였다. 성안에 있는 소를 모두 잡아 그 고기를 제단에 올려놓고 하늘에 승전을 기원하는 천제를 지내고 그 제상에 올렸던 소고기를 비빔밥으로 나누어 먹었다. 한마디로 목숨을 하늘에 바치는 비빔밥 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에 소의 도살과 식용을 정책적으로 금지했고, 나이가 들어 일을 할 수 없거나 폐사한 소가 아닌 한 좀처럼 소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