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5. "어찌 정승을 사사로운 신하로 두시려 하십니까
조선시대 의정부의 정승이 세 명인 것은 고대 청동 솥이었던 정(鼎)의 발이 셋인 데서 딴 것으로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좌의정·우의정도 정1품의 극품(極品)이지만 영의정은 수상(首相)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권력 체계는 육조(六曹, 이·호·예·병·형·공조)→의정부→임금의 순서였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은 정승의 역할을 크게 중시했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치전(治典)'에서 이렇게 말했다. "총재(宰·재상) 한 사람을 잘 얻으면 육전(六典)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주(人主·임금)라는 직책은 재상 한 사람과 의논하는 데 있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총재다. 총재는 위로는 임금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관이 만민을 다스리는 것을 통괄하니 그 직책이 큰 것이다." 임금이 할 일은 재상 한 사람과 정사를 의논하는 데 있다는 것이 정도전의 조선 권력 구조 구상이었다. 그런데 임금이 의정부를 제치고 육조로부터 직접 보고받고 결재하면 의정부는 할 일이 없어진다.
↑조선시대 정승 임명 문제에 대해서는 신하도 임금에게 간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진은 MBC 사극 <화정>의 한 장면. ⓒ MBC 제공
그래서 조선은 의정부의 권한이 강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시행했다. 육조에서 의정부에 먼저 보고해 심의를 받는 제도로서 임금은 '재상 한 사람과 국사를 논의한다'는 정도전의 구상을 제도화한 것이었다. 의정부서사제는 의정부의 권한이 임금 못지않게 강했으므로 태종 같은 임금은 불만이었다. <사가집비(四佳集碑)>에는 태종 14년(1414년)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신개(申)가 '의정부에서 육조의 일을 결재하는 것은 임금의 권한을 대신이 갖는 것이라서 옳지 못하다'고 극력 아뢰었다고 전한다. 태종이 "애송이 선비〔竪儒〕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고 대신들이 권력을 독단한다고 망언한다"고 꾸짖었는데도 신개가 굽히지 않자 오히려 대신들이 떨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개의 주장이 태종의 속마음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의정부서사제가 폐지되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실시되었다.
'황희 정승' 신뢰한 세종, 영의정 권한 키워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는 직급만 높을 뿐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었다. 육조직계제로 임금의 권한은 커졌지만 임금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임금 혼자 처리해야 할 국사가 너무 과중해진 탓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이었다. 여러 병에 시달리던 세종은 재위 7년(1425년) 윤7월19일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제현(齊賢)을 맞이했는데, <세종실록>에서 '얼굴빛이 파리하고 검게 변한 것을 보고 비로소 병환이 심한 것을 알고 모두 놀랐다'고 전할 정도였다. 때마침 사신 제현이 요동의 의원(醫員) 하양(河讓)을 데리고 왔으므로 윤7월25일 직접 진찰시켰는데, 세종의 "윗몸은 성(盛)하고 아랫몸이 허(虛)한데, 이는 과로 때문〔憂勞所致〕"이라고 말할 정도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18년(1436년) 4월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환원시켰다.
그런데 모든 제도는 누가 운영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듯이 세종이 의정부서사제로 환원한 것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후기 문신 박동량(朴東亮·1569~1635년)은 <기재잡기(寄齋雜記)>에서 '수상(首相)은 자리가 비록 높기는 하나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左相·좌의정)은 이조·예조·병조 판서를 겸임하고 우상(右相)은 호조·형조·공조 판서를 겸임한다'고 전하고 있다. 즉 이조·예조·병조는 먼저 좌의정에게 보고하고, 호조·형조·공조는 우의정에게 보고하지만 영의정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의정부서사제로 바꾸면서 "옛날 의정부에서 서사(署事)할 때 좌의정·우의정만 도맡아 다스리고 영의정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예부터 삼공(三公)에게 임무를 전담시켰던 본의와 어긋나니 지금부터 영의정 이하가 함께 논의해 가부를 시행하게 하라(<세종실록> 18년 4월12일)"고 영의정도 서사에 임하게 했다. 그만큼 황희를 신뢰했던 것이다. <세종실록>은 "황희는 재상의 자리에 20여 년간 있으면서 지론(持論·주관하는 의논)이 너그럽고 후한 데다 분경(紛更·뒤흔들어서 고침)을 좋아하지 않고, 나라 사람들을 잘 진정시키니 당시 사람들이 진정한 재상〔眞宰相〕이라고 불렀다(<세종실록> 31년 10월5일)"고 말할 정도로 황희는 임금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런데 타인에게 관대했던 황희는 유독 김종서에게 엄했다. 김종서가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황희에게 공조에서 약간의 주과(酒果)를 대접하게 하자, 황희는 화를 내면서 '시장하다면 예빈시(禮賓寺·사신과 고관들에 대해 잔치와 음식을 제공하는 관청)에서 접대하면 되는데 왜 공조에서 사사롭게 제공하는가'라면서 김종서를 불러놓고 크게 꾸짖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정승 맹사성(孟思誠)이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저명한 대신)인데 공은 어찌 그리 심하게 대하시오"라고 물었다. 황희는 "이는 내가 김종서를 옥(玉)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오"라면서 "김종서는 성격이 강하고 날카로워서 일을 과감하게 하니 훗날 우리 자리에 앉아서 일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그르칠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는데, 나중에 황희가 자신의 자리에 김종서를 추천했다고 <지소록(識少錄)>은 전한다.
임금에게도 냉엄했던 정승 간택
정승의 자리는 나랏일에 무한 책임을 져야 했다. 중종 4년(1509년) 윤9월 우레와 번개가 치자 영의정 유순, 좌의정 박원종, 우의정 유순정 등 반정(反正) 공신들이 "어찌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셨기 때문이겠습니까. 신 등이 그 직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라면서 사직했다. 물론 중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예상한 사직이었다. <중종실록> 사관(史官)은 이때 한 정승이 정광필(鄭光弼)에게 "하늘에 우레가 우는 것은 사람의 배가 울리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울다가 말 것인데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농담했다고 전한다. 정광필은 웃으면서 "배에 병이 나서 울리지만 배를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아서 병이 생긴 것은 사람 때문인데, 어찌 사람이 책임이 없다고 하시오"라고 되받았다. 그런데 당대의 실세 정승들을 쏴붙였던 정광필도 정승이 되었다.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승 자리가 비자 누군가 신용개(申用漑)에게 "누가 정승이 될 것 같소"라고 물었다고 전한다. 잠시 생각하던 신용개는 정광필을 돌아다보면서 "조정에 아저씨만 한 분이 없으니 틀림없이 아저씨가 승진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신용개는 정광필의 조카뻘인데, 그의 말대로 정광필이 정승이 되었다고 <송와잡설(松窩雜說)>은 전한다. 중종 8년(1513년)의 일이다. 그 후 정승 자리가 다시 비어서 신용개에게 한참 있다가 혼잣말로 "나만 한 사람도 없으니 면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대로 되었다.
이는 의정부서사제든, 육조직계제든 정승 자리는 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정승 인사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될 만한 사람이 아닌 사람이 정승이 되면 비록 국왕이 직접 인선했어도 큰 물의가 발생했다. 숙종은 재위 13년(1687년) 우의정이 공석이 되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좌의정 이단하(李端夏)에게 복상단자(卜相單子·정승 후보 명단)를 올리라고 명했다. 두 정승이 이숙(李)·이민서(李敏敍)·신정(申晸)·여성제(呂聖齊) 등 여러 사람을 추천했으나 숙종은 모두 거절했다. 두 정승은 숙종에게 의중의 인물이 있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묻자, 숙종은 "이조판서 조사석(趙師錫)이 국가 일에 마음을 다했음을 알고 있다"고 거명했다. 임금이 직접 천거했는데 거절할 수 없어서 조사석은 우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경연에서 김만중(金萬重)이 "조사석이 대배(大拜·정승이 됨)된 것은 후궁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의 집과 친하기 때문이라고 온 나라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숙종실록> 13년 9월11일)"라고 숙종에게 직접 따졌다. 장희빈 덕분에 정승이 된 것 아니냐는 항의였다. 김만중은 이 말의 출처를 대기를 거부했으나, 2년 후 효종의 차녀이자 숙종의 고모인 숙안공주(淑安公主)의 아들 홍치상(洪致祥)이 한 말로 드러나 홍치상이 사형을 당했다. 정승 물망에 오르지 못했던 사람을 정승으로 삼은 것이 공주의 아들이 사형당하는 사태로 비화했던 것이다.
↑3월31일 박근혜 대통령과 이완구 총리(맨 왼쪽)가 국무회의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마친 후 착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왕조 국가에서도 정승들은 임금 개인의 사신(私臣)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임금의 사신이 아니라 국신(國臣), 즉 나라의 신하라는 것이었다. 숙종이 재위 43년(1717년) 사관과 승지를 배제하고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李命)과 독대했을 때 정승의 처신에 대한 물의가 일었다. 이 해가 정유년이어서 '정유독대(丁酉獨對)'라고 불리는데, 이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조선 후기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세자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처럼, 숙종과 이이명의 독대는 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우의정을 역임한 소론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로 관을 들고 상경해서,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43년 7월28일)라고 숙종과 이이명을 함께 비판했다. 윤지완은 한번 정권을 바꿀 때마다 숱한 목숨을 앗아갔던 숙종에게는 '어찌 정승을 사인으로 삼을 수 있느냐'고, 이이명에게는 '정승이 어찌 임금의 사신이 될 수 있느냐'고 꾸짖을 정도로 정승의 무게를 중시했다. 결국 전 정승 윤지완의 이런 저항 때문에 숙종과 노론은 세자를 교체하지 못했다.
연이은 '총리 잔혹사'는 인사의 실패
이완구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면서 '총리 잔혹사'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은 총리감이 아닌 인물들을 거듭 총리로 지명하거나 임명한 데 있다. 현행 대통령제에서 총리는 육조직계제 때의 정승과 비슷한 존재다. 그간 '대독 총리'라는 비아냥까지 있었던 것은 육조, 즉 장관들이 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의정부서사제든, 육조직계제든 될 만한 사람이 정승이 됨으로써 정승 자리의 무게를 높였다. 윤지완의 말대로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였다. 이번에는 정권이 아니라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인재를 지명해서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의 권위를 되살리기 바란다. 사람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을 외면하기 때문에 인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