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 (4)만리장성 동쪽
한국 고대사는 중국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역사 해석에 참고하는 문헌들.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수서, 구당서, 신당서, 통설등 모두 중국의 기록입니다.
우리 기록인 삼국사기마저 중국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되었으니 말 다한거죠.
중국 기록이라 함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는 우리 관점이 아닌 중국의 관점에서 보고, 중국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관점에서 보고 우리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그만큼 오류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고구려(高句麗)를 좋은 의미로 받아 들입니다.
하지만 카론은 고구려(高句麗) 별로입니다.
왜냐구요?
그냥 한자를 그대로 해석해 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고(高)는 높다의 뜻이 강합니다.
려(麗)는 곱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원뜻은 사나운 산짐승 혹은 산신을 뜻합니다.
정리하면, 고려는 "높은 곳에 사는 사나운 짐승" 혹은 "높은 곳에 사는 산신" 의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여기에 구(句)가 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句)를 구절, 글귀라고 풀이하는데, 이 글자는 허리를 구부리고 손으로 감싸 안은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허리를 구부린다는 것은 예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굴복을 의미합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나운 짐승이 굴복하다.
의미가 좀 이상한가요?
좋다 나쁘다를 떠나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지는 모두 역사를 기록한 문헌의 출처 때문입니다.
우리 관점이 아닌 중국의 관점에서 쓰여져 있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역사를 정확히 해석하려면 우리가 아닌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받아들였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학계에서 정리한 정설과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 카론은 우리 학계에서 정리한 근거인, 순수 중국 관점의 기록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요동 동쪽에 조선이 있었습니다.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위만 조선을 세웠고, 기원전 108년에 위만 조선은 한나라에 멸망 하였습니다.
문헌을 보면 조선은 구려, 옥저, 예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인들이 위만 조선의 영역을 세 지역으로 나눈 것입니다.
옥저와 예는 한사군이 있었던 곳인데요.
기원전 8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진번군은 낙랑군에 통합되고, 임둔군은 현토군에 통합됩니다.
대략, 예 지역은 낙랑군, 옥저 지역은 현토군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전 글에서 옥저를 어떤 방식으로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로 구분했는지 설명했는데요.
* 남옥저 - 한나라가 정복한 지역.
* 북옥저 - 고구려가 정복한 지역.
* 동옥저 - 어디에도 점령되지 않은 온전한 옥저.
한나라가 정복한 지역이 남옥저이므로, 현토군이 관리한 지역은 남옥저 지역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75년에 이맥이 침입하자, 현토군이 남옥저 지역에서 구려 지역으로 옮겨 갑니다.
현토군의 위치는 요동의 북쪽이므로 여기서 이맥이라 하면 오환 혹은 구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려 지역은 위만조선이 멸망할때 장악된 곳인지...
아니면 현토군이 구려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장악한 곳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구려지역이 현토군에 속하게 되면서 투항한 구려 사람도 있고, 도망간 구려 사람도 있다는 점입니다.
투항한 사람은 고구려현의 사람들이고, 도망간 사람들은 북부여에 흡수된 사람들 입니다.
기원전 59년 : 북부여 성립
졸본은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있었던 곳입니다.
북부여와 현토군 사이에 수년간 분쟁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북부여가 현토군과의 분쟁을 끝내고 동부여로 옮겨가게 됩니다.
부여의 왕이 도읍을 국경에서 동쪽으로 옮겼다는 것은 더 이상 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같으니까요.
이때 구려에서 온 사람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북부여에 충성했는데 배신당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부여에서 탈출한 주몽이 졸본에 오자 바로 독립을 선언합니다.
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
고구려는 비류국을 합병한 후 그들이 취할 수 있는 행인국과 북옥저를 장악합니다.
* 행인국 : 대릉하 북쪽 조양 지역
이때 고구려는 북쪽의 부여와 남쪽의 낙랑군 사이에서 마치 샌드위치 상태였습니다.
결코 이들과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기 2년에 낙랑군의 호구도 크게 증가합니다.
보통 호는 가구, 구는 인구수라고 하는데요.
카론은 호는 병사수, 구는 세금을 내는 사람수로 간단히 정리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내용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낙랑군 호가 2만 이상이 늘었다는 것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일 거라 판단하여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문헌상으로 서기 3년에 유리왕이 위나암에 성곽을 쌓고 국내로 천도하였다고 합니다.
즉, 전쟁을 대비한 것입니다.
당시 전운이 감돌던 국경은 바로 낙랑군 영동7현 지역입니다.
고구려가 남쪽에 병력을 집결시키자 바로 북쪽에 있던 부여가 움직입니다.
병력 5만을 동원했으니 고구려 입장에서는 크게 위태로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고구려를 돕습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많은 병사들이 동사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부여가 큰 타격을 입고 회군하자 고구려는 모든 병력을 남쪽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됩니다.
왕망의 신나라(서기 8년에서 23년) 시대는 한나라가 크게 약화된 시기입니다.
고구려가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 것입니다.
서기 14년 고구려는 양맥을 점령한 후 현토군의 고구려현을 점령하였고,
남쪽을 방어하던 병력을 북으로 돌려 서기 21년~22년에 부여까지 공격합니다.
부여왕 대소가 죽고, 부여는 분열하여 힘이 크게 약화됩니다.
고구려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후국이 되어 독립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소국들을 공격해 점령합니다.
서기 26년에 개마국과 구다국이 항복하였고, 낙랑군 영동7현 지역이 고구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 개마국, 구다국은 낙랑군 영동 7현에서 독립한 후국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구려가 국경을 자주 침범하자 한나라가 드디어 군대를 동원합니다.
서기 28년 요동태수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위나암성을 포위하였고, 고구려는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을 농성합니다.
이 전투도 낙랑군 영동7현에서 벌어졌습니다.
카론은 위나암성은 조양시 인근 (봉황산과 대릉하 남쪽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는데요.
* 한 눈에 봐도 군사적 요충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위깊게 살펴야 할 부분은 영동7현 아래에 붉은색으로 표시한 고구려 성곽입니다.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그 고구려 성곽이 왜 그곳에 있을까요?
고구려와 낙랑군의 국경 지역이라고 하면 답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고구려를 중심으로 각 지역을 살펴보았는데요.
지금부터는 현토군을 중심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맥이 침입하여 현토군이 옮겨갈때 구려(句麗, 句驪)가 등장합니다.
句麗는 굴복한 산짐승, 산신으로 현토군의 고구려현과 관련된 것이며,
한자가 다른 구려(句驪)는 말을 키우는 신짐승, 산신으로 현토군의 서개마현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마는 말이 땅을 뒤덥고 있다라는 뜻이으로 말을 키우는 곳, 말의 주산지를 말합니다.
* 참고로, 구려를 구려(九黎)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아홉 마을이라는 뜻의 구려(九黎)와 구려(句麗)와는 전혀 다른 한자입니다.
현토군은 후에 요동군의 망평현, 요양현, 고현, 후성이 편입되는데...
그림을 보시면 알겠지만
망평현은 대요수가 장성에 진입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요양은 요산, 소요수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나머지 지역들도 망평현과 요양현 사이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한데요.
지리적으로 현의 인수인계가 매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자수에 대한 설명입니다.
현토군의 북쪽에서 마자수가 발원하여 바다에 도착할때까지 2100리를 흐릅니다.
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요.
문헌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국내성과 마자수를 연관지어 설명하는 문헌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내성은 요동에서 500리 밖에 있는데요.
국내성 서쪽에 강이 있는데 이 강이 염난수와 만나고 2100리를 흘러 동쪽의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즉, 마자수 얘기입니다.
* 마자수의 뜻은 말 발자국이 어지럽게 있는 강가를 의미함
동그라미 친 곳을 중간지점을 중심으로 마자수를 살펴보면 시작점과 끝점이 보이실 것입니다.
동그라미 친 곳이 바로 카론이 추정하고 있는 국내성입니다.
국내성 남쪽은 영동7현이 있는 곳으로 국경지역인데요.
국내성과 국경지역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한자 국(國)은 나라를 의미하는데요.
원래 뜻은 무력으로 국경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뜻이 나라이므로 나라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많지만...
고구려 국내성의 경우는 나라가 아닌 무력으로 국경을 지키는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동의 장성에서 길을 따라 거리를 재면 국내성은 500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자수를 정리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강의 길이였습니다.
현재 요하는 2100리보다 더 길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자수와 염난수가 합류한 곳을 시작으로 2100리가 아닌가 고민도 했었는데요.
그것보다는 타민차간 사막과 관련된 대륙의 건조화로 인하 강 줄기가 변한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타민차간 사막을 표시했습니다.
이곳은 주변지역보다 높아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타민차칸 사막이 끝나는 동쪽 지역이 과거 큰 호수 혹은 습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과거 서압록으로 불리는 습지였죠.
압록은 강물이 청동오리 머리색과 비슷하다고 지은 이름입니다.
짙은 녹색 강물은 습지에 있는 녹색물 이외에는 달리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즉, 압록수는 큰 습지가 있는 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압록수는 서압록과 압록수라는 2개의 이름이 있으니 습지도 2곳이어야 합니다.
한 곳은 타민차간 동쪽 지역에 있었고, 다른 한곳은 요하 하구에 있습니다.
* 요하 하구 판진(판금)시 주변에 세계 6대 습지가 있습니다.
여러 단서들을 찾아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받아 들이는 부분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한번 정도는 만리장성 동쪽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