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와 숫자 속에서 들어난 인류문명사의 비밀
수와 숫자 속에서 들어난 인류문명사의 비밀
운명적인 수와 카오스의 복잡계로 지배되어온 인류문명사회를 극복하고 개혁
▲ 요동치는 수 속에서도 일정한 대자연의 규칙이 작용
수(數)와 숫자의 개념적인 차이점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수’란 단어와 ‘숫자’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정확히 ‘수란 무엇인지’ 혹은 ‘숫자란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수랑 숫자랑 모두 같은 거 아니야?’라고 말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數)와 숫자는 엄연히 그 차이가 있다. 우리들이 현재 현대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숫자는 0, 1, 2, 3, 4, 5, 6, 7, 8, 9까지 모두 10개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어!! 12라는 숫자도 있는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12도 숫자로 보면 1과 2라는 기본적인 숫자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숫자는 수를 나타내는 글자(표기)를 말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수(數)는 셀 수 있는 사물을 세어서 나타낸 것으로서, 그 숫자에 어떤 자릿값이 포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數)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事物, 物件, 物質)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숫자는 그 수를 표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숫자가 있기 전에도 수(數)는 자연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류의 전 역사적인 삶이라는 것은 이 수와 숫자들의 개념들을 정리하고, 그리고 이를 자신들의 삶에 적용시켜오면서 살아 온 삶이었다는 것이다. 즉 선사시대의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전 인류가 살아온 삶이라는 것은, 결국 이러한 수와 숫자의 개념들을 사회학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켜오면서 살아 온 삶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제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수와 숫자들 속에 숨어있는 모든 자연계의 비밀에의 법칙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대자연의 위대한 자연사상이 내포된 수(數)와 숫자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수(數)는 자연적인 모든 존재물들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리고 그 숫자는 자연적인 존재물들을 어떤 기호로 표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수와 숫자의 개념 속에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사상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모든 인류는 수의 기본적인 개념으로 자연수를 받아들여, 인류의 복잡한 심성문화를 깨끗한 자연의 심성문화로 돌리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이러한 자연수에는 무수히 많은 수(數)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數)는 곧 자연의 모든 물질적인 상(相)으로 우리들이 어떤 일이나 물건의 수효 등을 셀 때, 그 많고 적음의 결과를 나타내거나, 혹은 그 물건들의 차례·위치 등을 표현하는 경우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이 무수한 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 수(數)의 정리과정에서 나온 수들이 자연수와 더불어 정수 · 분수 · 소수 · 유리수 · 무리수 · 실수 · 허수 등과 같은 수들이다.
인류는 이러한 수들을 통틀어 현대사회에서 통칭적으로 수(數)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수(數)의 기본은 자연수(自然數)이며, 이 자연수의 개념은 사물이 모여 있는 것을 세는 데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그 세는 것을 숫자로 표기한다. 인류의 선사시대 역사에서는 이 세는 것을 숫자로 표기하기 위해 처음에는 동굴의 암벽이나, 지면, 나무판자 등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수만큼의 줄을 긋는 표현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문명이 신석기문명의 부족사회로 진입하면서부터, 수(數)에도 인류문명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수를 서로 하나로 뭉쳐 조직화하는 수진법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연사상을 가지고 인류문명이 점진적으로 진화했듯이, 수도 자연적인 자연수로부터 시작해서 수진법으로 서서히 조직화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인류최초의 집단부족문화와 함께 발전한 수(數)의 십진법 체계
우리들은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집단부족문화의 점진적인 발전 형태를 성(性)에 기초를 둔 사회조직(씨족―포족<胞族, phratry>―부족―부족연합체―국가)의 순서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국가는 최종적으로 모든 혈연이 배제된 가운데, 이차적인 사회관계에 따른 지연에 입각해 조직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조직사회의 원리가 그대로 수진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바로 인류의 사회집단문화가 씨족―포족(胞族, phratry)―부족―부족연합체―국가라는 조직된 한 묶음의 형태로 발전되었듯이, 수(數)도 개별적인 수의 특성에서 주어진 모든 수를 한 묶음으로 뭉쳐 전체적으로 자기조직화 하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류문명사의 발전과 수(數)의 발전사가 사로 비슷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수진법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수진법은 수량을 나타낼 때 몇 개를 한 묶음으로 하여 어떤 수를 나타내느냐 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처럼 탄생한 인류 최초의 수진법(數進法)은 바로 10진법이다.
▲ 숫자 0 이 10 진법 체계에 도입됨으로서, 실질적인 수학과 인류문명이 발전되는 계기로 작용
10진법은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0, 1, 2, 3 ...... 9까지의 10개 숫자들을 사용하여 만든다. 하지만 인류문명의 수학사에 있어서 처음에는 큰 수를 표시할 수 없었으므로 무엇인가, 인류는 새로운 연구를 하지 않으면 큰 십진법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불편을 없애 준 것이 십진법에 있어서 수(數)에 대한 자리잡기의 원리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리잡기의 원리에 숫자 0 이 사용된다. 이 방법은 자연수의 기본수를 10곱씩 불어나게 하여, 그 큰 자리매김의 숫자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의 10곱은 10, 10의 10곱은 100, 100의 10곱은 1,000, 1,000의 10곱은 10,000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인류문명사에 있어서 이러한 원칙을 최초로 사용한 숫자가 바빌로니아의 숫자라고 한다. 즉 바빌로니아에서 처음으로 십진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들은 바빌로니아 10진법의 자리매김에 사용되는 기본적인 정신문화 속에, 바로 숫자 0 이 라는 숫자가 들어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이집트에서는 각 단위의 진법마다 새로운 기호들을 만들어, 그 단위가 몇 개 있는지에 따라서 그 기호를 그 개수만큼 늘어놓는 수진법을 사용했던 것이며, 또한 각 진법단위를 나타내려고 하는 개수만큼 늘어놓는 대신 완전히 다른 기호로 나타낸 그리스숫자의 진법구조 역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인류문명사의 진법구조의 조직문화가 바로 숫자 0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이 숫자0을 기본개념으로 하여 인류문명사의 전 발전과정을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혼돈의 세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인류문명의 비전
우리들은 인류의 문명을 논하는데 있어서, 항상 알 수 없는 스스로의 운명 앞에 모든 인류의 운명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인류는 이러한 주어진 운명 앞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모든 삶을 보이지 않는 신에게 의존하는 피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고 만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주사위 놀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우리들이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주사위 놀이는 사교게임과 같은 놀이 등을 할 때 사용하는 작은 입방체의 놀이 기구를 사용하는 놀이문화로서, 이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어떤 미지의 값에 맡기는 경우와 같다. 즉 자신의 운명을 알수 없는 신에 맡기는 것이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알 수 없는 결과 값에 맡기는 경우나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때 주사위 놀이에서 사용하는 표준주사위의 각 면은 1~6개의 작은 점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들은 이 각 면의 점들은 살펴보면, 서로 반대편 면의 점들과 합하여 1-6, 2-5, 3-4와 같이 되어, 그 합산 값이 항상 7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때 합해진 숫자 7은 행운의 숫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행운의 숫자가 나오기를 마음 속으로 기대하면서 주사위 놀이를 한다. 그리고 행운의 확률을 고대한다. 또한 이 행운의 확률게임을 위해 주사위 놀이에 사용되는 주사위의 수와 함께 주사위의 6개의 점들을 조합해서 수학적인 확률 값을 높이려고 서로 노력한다. 하지만 이때 나타나는 확률 값은 여전히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 모두의 미래운명을 그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주사위 놀이를 인간의 운명과 비유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힘든 일을 할 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고들 한다. 이 말은 우리들이 하는 일의 결과가 미래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일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래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알 수 없다면, 모든 인류에게는 희망이라는 삶의 역사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이 희망이라는 단어를 수학적인 개념으로 찾아보아야만 한다. 또한 이 희망이라는 단어 앞에 확률게임의 신뢰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알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신뢰성을 어디에서 가져와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대자연 뿐일 것이다.
우리들이 이러한 믿음의 출발을 대자연에서 찾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 모두가 대자연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자연의 모든 소산물들은, 과연 알 수 없는 값에서 확률을 높이는 구조로 조금이라도 만들어져 있는가이다. 우리들은 이제 이를 살펴보기 위해 자연수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수의 출발은, 바로 대자연을 상징하는 자연수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자연수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스스로 그러한 수'이다. 즉 자연수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신(神)의 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수의 복잡계(complex system)에서 수학적인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어떤 규칙성을 찾을 수 있는 가이다. 만일 우리들이 이를 자연계에서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주사위 놀이를 매우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삶에 있어서 항상 행운의 숫자 7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수의 규칙성이 자연계에 존재하는지를 살펴 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대자연은 항상 단순계와 복잡계에서 규칙적인 수(數)의 법칙으로 작용
우리들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복잡성이 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확률이라는 규칙성이 들어있다는 어떤 신뢰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규칙성에 희망의 확률을 걸어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확률의 규칙성을 우리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수의 규칙성을 살펴보기 위해 아래와 같은 계산식을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들은 아래의 식에서 단순계와 복잡계의 상호 호완적인 어떤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다. 바로 어떤 일정한 패턴의 수식이 주어지면, 아래와 같은 단순성과 복잡성의 계가 서로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1 x 8 + 1= 9)의 식에서 복잡하게 계산을 하지만 답은 간단하게 9가 나온다는 것이며, 또한 다른 식( 111111111 x 111111111 = 12345678987654321)에서 일정한 숫자 1을 배열하여 곱하면, 복잡한 수 12345678987654321가 나온 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에는 어떤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 x 9 + 2 = 11). (98765432 x 9 + 0 = 888888888)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옴을 알 수 있다. 이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사회구조화 속에서도 일정한 규칙성을 찾아낼 수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들의 사회를 우리들이 모두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 x 8 + 1= 9. 111111111 x 111111111 = 1234567898765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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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x 9 + 2 = 11. 98765432 x 9 + 0 = 888888888 |
우리들은 또한 1부터 9까지의 숫자 중 8을 빼고 곱하는 상대수를 반드시 9의 배수로 한다면, 놀랍게도 같은 숫자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수는 142857 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왜 그렇게 신기한 것일까?
▲ 신비한 수 142857의 규칙성
우리들은 이를 살펴보기 위해 숫자 142857 에 1부터 6까지 차례로 곱해보자. 그러면 똑같은 숫자 6개가 자릿수만 바꿔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142857 에 7을 곱하면 놀랍게도 999999 가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142857을 두개로 쪼개서 더해 보면, (142 + 857 = 999) 이고, 역시 세 개로 쪼개서 계산해 보면 (14 + 28 + 57 = 99) 가 된다. 마지막으로 142857 을 제곱하면 20408122449 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를 둘로 쪼개서 다시 더하면 (20408 + 122449 = 142857) 원래의 형태로 다시 수가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12345679 x 9 = 111, 111, 111 . 142857 x 1 = 142857 |
우리들은 이들 수식에서 단순성과 복잡성의 수가 어떤 규칙적인 계를 서로 이루며 자기 조직화하는 경향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는 복잡성의 단순한 이치를 설파하는 그 확률성을 높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살아나가고 있는 대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이 이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가이다. 우리들은 이제 이를 면밀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을 꽃 피우는데 사용하여야만 한다.
카오스의 복잡계(complex system)에서 꽃핀 운명의 수
▲ 프렉탈(fractal)형태로 이루어진 낙뢰와 리아스식 해안선
우리들은 자연수가 만들어내는 수식에서 어떤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규칙적인 단순성과 복잡성이 서로 하나로 뭉쳐 가면서 상호 호환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학의 이치는 이탈이아 수학자 피보나치(Fibonacci)가 발견한 피보나치(Fibonacci)수열에서 극명하게 들어난다. 뿐만 아니라 이 피보나치(Fibonacci) 수열 속에는 자연계의 창조원리가 그대로 숨겨져 있다.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들이 살아나가는 자연계는 매우 불규칙하며 무질서하게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매우 단순하고 정밀한 수학적인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 자연계에서 나타난 이러한 수학적인 원리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황금비, 황금 각, 황금 직사각형, 피보나치수열, 대수 나선, 프랙탈 등이다. 우리들은 이들 중 피보나치수열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 피보나치 수열 방식으로 분화하는 해바라기와 앵무조개의 배열
이 피보나치수열이란 인접한 두 수의 합이, 그 다음 수가 바로 되는 수열의 형태를 말한다. 즉, 1, 1, 2, 3, 5, 8, 13, 21, 34, 55, 인 수열이며, 보통 X1=X2=1, Xn+Xn+1=Xn+2 (n=1,2,3…) 으로 나타낸다. 이렇게 단순한 수열이 중요해진 것은, 이 수열이 자연계의 일반 법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피보나치 수열은 바로 황금비율(goldenratio. 1.618)로 잘 알려진 수로, 자연계의 많은 구조물들이 바로 이와 같은 수열배열 방식에 따라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 황금비율로 자기조직화하며 작동하는 나선은하와 태풍
▲ 프렉탈(fractal)의 이치에 따라 분화하는 나뭇잎과 줄기의 분화방식(일즉다 다즉일, 자기조직화)
이러한 황금비율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숨겨진 질서를 잘 보여준다. 앵무조개와 암모나이트 껍질은 황금비율에 맞춰 나선 모양의 소용돌이를 이루며, 바깥으로 갈수록 증가하는 기하학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해바라기와 솔방울 같은 식물의 성장에도 황금비율이 적용된다. 해바라기 씨앗을 보면 두 개의 나선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데, 각각의 씨앗은 피보나치수열에 따라 잘 배열되어 있다. 또한 곧게 뻗은 식물의 줄기를 보면, 잎들이 나선형 패턴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형태는 잎이나 가지가 햇빛과 비를 최대한 흡수할 수 있는 구조이다. 나선 형태는 DNA처럼 복제와 성장을 나타내는 자연에서 무수히 많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기하학의 한 예에 불과하다.
▲ 인체의 황금비율(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울러 황금비율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 것으로 프랙탈(fractal)을 들 수 있다. 프랙탈(fractal)이란 부분과 전체가 크기만 다를 뿐 서로 똑같은 모양이 무한히 계속되는 자기유사성을 가진 기하학적 구조라는 것이다. 이런 일정한 기하학적 패턴을 보여주는 프랙탈(fractal)은 해안선, 눈송이, 양치류 식물, 나무껍질 등 성장 또는 복제와 관련해서 자연 곳곳에 수없이 많이 숨어 있다. 눈송이는 정삼각형이 특정한 패턴으로 만들어지면서 점점 커진다. 양치류 식물에서 잎의 각 부분들은 마치 잎 전체를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한 부분을 확대하면 잎 전체의 모양과 같아진다. 이것은 성장 단계마다 재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모양 그대로 복제되는 자연 속에 숨겨진 질서체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생명체 고유의 특성을 전달하는 유전자의 DNA 역시 기하학적 나선 모양으로 스스로를 복제하여 인체를 구성한다.
▲ 프렉탈(fractal)의 황금비율을 형성하는 눈송이의 모습
우리들은 이처럼 자연수의 상들이 만들어내는 자연계에서 복잡하고 무질서한 세계가, 실상은 눈에는 잘 들어나지는 않지만 질서정연한 체계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질서체계를 사회인문학적으로 발전시켜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통상적으로 무질서한 혼돈(混沌)의 세상을 카오스(chaos)의 세계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질서한 카오스(chaos)세계를 인류최초로 깨끗이 학문적으로 정리한 민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대 선사시대에 있어서 환국문명을 이룬 우리의 위대한 한민족이다. 그런데 고대 선사시대의 한민족은 어떻게 카오스(chaos)의 세계를 잘 정리하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민족의 위대한 경전인 천부경을 통해서이다.
우리들이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천부경의 창조론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의 이치를 들어 우주창조론을 설명한다. 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의 창조론은 지극히 자연적인 자연론을 대변하며, 이 문장에서 나타나는 무(無)는 '텅 빈 공간' 또는 '대공허'를 나타내는 절대적인 공간으로,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시공간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때 탄생하고 사라지는 일(一)은 절대적인 무(無)의 공간에서 탄생하고 사라지는 공간이 아니라, 순서를 기다려 그 다음 순서로 진행하여 자연적으로 생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천부경의 창조론은 그대로 고대 카오스이론을 정립한 그리스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인류가 만들어가는 모든 건축물에는 복잡하지만 일정한 수학적인 단순법칙이 존재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본래 카오스(chaos)란 그리스인의 신비적, 신화적 우주 개벽설에서, 만물이 나타나기 이전의 혼돈(混沌)상태를 이르는 말에서 유래한다. 이때 카오스(고대 그리스어:χάοςKhao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그리스 태초의 신들 중 하나이며, 카오스(chaos)는 그대로 '텅 빈 공간' 또는 '대공허'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그리스 신화에서 카오스는 무(無) 또는 절대적인 공간으로, 카오스 외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카오스 다음에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가이아(땅, 대지)라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이아는 카오스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카오스 다음에 자연적으로 카오스라는 공간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타르타로스와 에로스가 그 다음 순서대로 나타남으로써 태초에 자연적으로 나타난 네 신(즉, 4가지 힘 · 원리 또는 법칙)들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 신화는 그대로 천부경의 정연한 이치를 설파한 신화이다. 천부경의 창조론은 81개의 문자 중 30개의 숫자로 자연적인 순리성을 들어 창조론을 설명한다. 이처럼 우리들은 천부경과 그리스의 카오스(chaos)신화를 통해서 우주의 창조론이 자연적인 질서 속에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창조론은 그대로 자연 속에서 탄생하는 모든 자연수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자연수는 질서정연한 체계를 가지고 우리사회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카오스(chaos)의 세계처럼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로 보일지는 몰라도, 그 실상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바로 질서정연한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자연수의 변화에서 그대로 들어나며, 또한 모든 만물의 생성이치에서 그대로 들어난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카오스(chaos)의 원뜻은 "입을 벌리다(chainein)"라는 뜻으로 "캄캄한 텅빈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텅빈 캄캄한 공간의 세상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혼돈의 세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혼돈의 세계는, 바로 생멸이 질서정연하게 작동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고대사회로부터 인류가 지금까지 존속해 온 것은 이와 같은 질서체계가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우리들은 지금까지 자연수의 질서정연한 변화와 자연계의 규칙적인 체계성을 통해 혼돈의 세상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신적인 삶의 문화가 모두 우리민족의 문명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바로 이는 우리들이 늘 상 사용하는 수와 숫자 속에 모든 인류문명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들은 운명을 결정하는 주사위 놀이에서, 이러한 대자연의 이치를 바로 깨달아 상호 호환하는 놀이 문화를 만들고, 또한 새로운 인류문명사회를 제대로 선도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나가는 운명이란 주사위 놀이처럼 주사위를 던지고 그 확률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확률론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숨겨진 베일의 비밀을 찾아 세상을 바로 혁신하고 개혁하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