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溪誌 寓居人物 부터 한역2
寓居人物 우거인물
**** 여기에 실린 사람 말고 다른 곳에도 많다.
*黃汝獻 황여헌
字獻之,翼成公之玄孫也,文章與湖陰,退休,齊名,華人,見其升枝歌.歎曰勝於東坡竹枝歌
자헌지,익성공지현손야,문장여호음,퇴휴,제명,화인,견기승지가,탄왈승어동파죽지가
→ 자는 헌지이며 익성공의 고손이다. 문장이 호음공과 퇴휴공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며 중국사람이 그의 승지가를 듣고 탄식아여 말하기를 소동파의 죽지가보다 더 낳다고 말하였다.
云,才氣超越,稟質俊邁,不能下士坐是見敗,以吏卽貶爲縣監,後爲蔚山郡守終焉,
운,재기초월,품질준매,불능하사좌시견패,이리즉폄위현감,후위울산군수종언
→ 재기가 특별나고 타고난 바탕이 매우 뛰어나서 아래 선비들이 이길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랑에서 벼슬이 낮아져 현감이 되었다가 후에 울산군수를 끝으로 하였다.
有柳村集,而無子孫,故不傳於世
유유촌집,이무자손,고부전어세
→ 유촌집이 있으나 자손이 없어 세상에 전하는바 없다,
∠稟質 ;타고난 품성과 바탕 ∠俊邁 ;재주와 지혜가 뛰어남 ∠貶폄;지위가 낮아지다
* 李舜齡 이순령
太宗大王六代孫,少有文名,與白沙李相公兄弟及,廣林君李廷立,石田成輅,華谷鄭起眞,
태종대왕육대손,소유문명,여백사이상공,형제급,광임군이정립,석전성로,화곡정기진,
→ 태종대왕의 육대손이다, 젊어서 학문의 명성이 백사 이항복 형제와 광림군 이정립과 석전 성로와 화곡 정기진
等十人爲友,號洛下十才子,其妻母居于立石里,萬曆庚辰間,挈家來覲,因留住矣,
등십인위우,호락하십재자,기처모거우입석리,만역경진간,설가내근,인유주의
→ 등 10여인이 벗이 되었는데 낙하 선생의 재주 있는 10제자라 하였다. 그의 장모가 입석리에 살아서 선조 경진(1580)년에 가족과 함께 와서 모시고 머물러 살았다.
壬辰之變,遇賊被害,子孫因居金化村
임진지변,우적피해,자손인거김화촌
→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자손이 김화촌에서 살게 되었다.
* 李景福 이경복
字綏之,廣陵府院君,領相克培之曾孫也.其祖母本縣,司醞崔豹之女,目居外鄕,早占司馬
자수지,광능부원군,영상극배지증손야.기조모본현,사온최표지여,목거외향,조점사마
→ 자는 수지이고 광능부원군 영상 극배의 증손이다. 그의 조모가 본현의 사온 최표의 따님으로서 외가고장에 와서 살았다, 일찍이 사마시에 급제하여
官至察訪,善詞賦,喜談論,家極豊富人,以風流好男子目之
관지찰방,선사부,희담론,가극풍부인,이풍류호남자목지
→ 벼슬이 찰방에 올랐다. 글을 잘 짓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고 가정이 넉넉한 부자로서 풍류를 좋아하는 호남자라고 하였다.
* 黃紐 황뉴
字會甫,號盤澗,汝獻之弟,參判孝獻之曾孫也,未冠受業于,愚伏鄭先生,篤志勸學,文章
자회보,호반간,여헌지제,참판효헌지증손야,미관수업우,우복정선생,독지권학,문장
→ 자는 회보 호는 반간으로서 황여헌의 아우요 참판 황효헌의 증손이다. 어려서 우복 정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도타운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문장이
夙成,弱冠屢占魁科,新豊,澤堂齊名,光海時以注書,不參廷請罷職,還鄕,稱注書者十餘年
숙성,약관루점괴과,신풍,택당제명,광해시이주서,불참정청파직,환향,칭주서자십여년
→ 일찍 숙성하고 20여세에 여러번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다. 신풍과 택당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광해군 때 벼슬이 주서(注書)일 때, 정연(廷筵)에 참석하지 않아 조정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0여년을 주서라고 칭하다가
∠占 차지하다점 ∠ 괴과(魁科, 문과의 갑과 제1인자)
仁祖反正後,屢遷官至持平,早卒,其孝友之行,學問之力,忠厚之風,實爲士林之儀表,中年
인조반정후,누천관지지평,조졸,기효우지행,학문지력,충후지풍,실위사림지의표,중년
→ 인조반정 후에 여러번 벼슬을 옮겨 지평이 되고 그때에 별세 하였다. 그의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학문이 힘이었으며 두터운 충성심과 너그러운 풍모는 사림의 모범이 되었다, 중년에
寓居于龍浦里柳村,故居後還,中年以終
우거우용포리유촌,고거후환,중년이종
→ 용포리 유촌에서 살다가 후에 돌아와서 중년에 별세하였다.
* 沈榘 심구
字秀方,靑城伯德符之後也,自京寓居藍田里,早占司馬,端默守靜,澹然於財利,不爲黨論
자수방,청성백덕부지후야,자경우거람전리,조점사마,단묵수정,담연어재리,불위당논
→ 자는 수방이요 청성백 덕부의 후예이다. 서울에서 남전리로 와서 살았는데 일찍이 사마(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성품은 단아하고 말수가 적고 고요하였으며 재리에는 맑았고 당파를 짖지 않았으며.
恥入色目中,人以此多之年至八十,容顔不衰亦可貴也,
치입색목중,인이차다지년지팔십,용안불쇠역가귀야,
→ 여색에 들면 부끄러워 하였다. 오래 살아 80에도 홍안이고 쇠하지 않은 것이 가히 귀한 일이었다,
* 丙子以前,學者 병자이전,학자 (병자년 이전의 학자들)
丙子以前,吾儕固多吉士好學,强正朴濠南,山老朴惟謹,李櫓也,
병자이전,오제고다길사호학,강정박호남,산노박유근,이노야,
→ 병자년 전에는 우리 무리에 학문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강정 박호남, 산노 박유근, 이노 이었으며
忠厚有風度,李亨運,李亨復(生員)也,以文辭鳴者,尹千之,朴惟和,尹一之,李析,
충후유풍도,이형운,이형복(생원)야,이문사명자,윤천지,박유화,윤일지,이석,
→ 충후한 풍도가 있었던 이들은 이형운 이형복이요, 문명을 날린 이들은 윤천지 박유화, 윤일지, 이석,
李格(進士)也,後進之有文名者,李景益,朴獻章,南應星也,鳴呼,邑運不幸
이격(진사)야,후진지유문명자,이경익,박헌장,남응성야,명호,읍운불행
→ 이격(진사)이요 후진들 중에 문명을 날린 이들은 이경익, 박헌장, 남응성이다, 오호라 읍의 운수가 불행하여
惑有抱才,而虛老者,惑多無命而夭折者,痛莫甚焉,卽今以伩爲業,連中鄕解者,朴之煌,
혹유포재,이허노자,혹다무명이요절자,통막심언,즉금이신위업,연중향해자,박지황,
→ 혹은 재주가 있으면서도 허송하며 늙는 사람과 혹은 수명이 짧아 젊어서 죽는이 많아 더없이 비통하다. 지금에 학문을 하여 진사시에 급제한 이들은 박지황(진사),
∠鄕解=進士試 진사 과거 시험 ∠伩=信 믿을신
(進士)沈明翼(寓居),朴世元,朴晦章,朴成杞,李友聃,朴天與,李大臨.李斗望,李友綱,(生員)(진사)심명익(우거),박세원,박회장,박성기,이우담,박천여,이대림.이두망,이우강,(생원)
→ 심명익(살고있는사람) 박세원, 박회장, 박성기, 이우담, 박천여, 이대림, 이두망, 이우강(생원)
朴舜章(進士),朴世樞,朴漢舒,朴守素,等又有後生之業儒攻文者稍多而今不盡錄
박순장(진사),박세추,박한서,박수소,등우유후생지업유공문자초다이금부진록
→ 박순장(진사), 박세추, 박한서, 박수조 등이며 후배들에 유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모두 싣지 못한다.
* 遺聞 유문 (소문을 남긴 사람들)
李師程 世居鷄城里,出於庶派,補忠贊尉,天性至孝,力田養其父母,便身之物,無不備具,及其이사정 세거계성리출어서파보충찬위천성지효역전양기부모편신지물무불비구급기몰여
→ 이사정은 계성리에서 대대로 살았다, 서자로 태어나 충찬위 벼슬을 했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고 힘을 다하여 그의 부모를 봉양하여 몸을 편안하게 하는 물건은 빠짐없이 갖추어 놓았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서파[庶派];서자(庶子)의 자손
歿,廬墓三年一不到家,雖當盛暑晝夜不脫,經帶腰背生蛆,父母忌辰齋,居悲痛異於他人以
몰,여묘삼년일불도가,수부성성주야불탈,경대요배생저부,모기진재,거비통이어타인이
→ 돌아 가시자 3년 여묘살이를 하면서 한번도 집에 오지 않았고, 더운 여름철에도 밤이나 낮이나 옷을 벗는일이 없어서 허리와 등에 구더기가 살았다. 부모님 제삿날에 슬퍼하는 것이 남들보다 더 많이 슬퍼하였다.
∠蛆구더기저
家甚貧常以祭需之不得,稱意爲痛,同鄕儒士,安國民,南守約,歎其誠孝,當其忌日必遺,以魚肉가심빈상이제수지부득,칭의위통,동향유사,안국민,남수약,탄기성효,당기기일필유이어육
→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제수를 작만하지 못했다. 몹시 괴로워 했는데 고향에 선비 안국민, 남수약이 그 정성스런 효도에 한탄하고 그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생선이나 고기를 놓아 주었다.
師程拜而受之泣而謝之,年至七十有人,言及其父事,則未嘗不垂涕,而對之可謂終身慕父母사정배이수지읍이사지,년지칠십유인,언급기부사,즉미상불수체,이대지가위종신모부모
→ 이사정은 울면서 받고 감사해 하였다. 연세 70세가 되어 부모에 대한 말씀을 하면 눈물 콧물 흘리지 않는 일이 없었고 가히 종신토록 부모를 그리워 한 사람이었다.
者也,竟無子,天道未可知,鄕無表而出之者,不得旌表云
자야,경무자천도미가지향,무표이출지자,부득정표운
→ 마침내 자식이 없었으니 천도(天道)를 알 수가 없다, 고향에도 표시가 없고 나가서도 정려를 얻지 못했다.
* 緇流正心 치류정심 (정심스님)
前朝末,賜號登堦大師,生於玉田里,或云典書崔灌之子,落髮于雙林寺,窮通大乘之法,
전조말,사호등계대사,생어옥전리,혹운전서최관지자,낙발우쌍림사,궁통대승지법,
→ 고려 말에 등계대사로 사호를 받았다, 옥전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전서 최관의 아들이라고 한다, 쌍림사에서 머리를 깎았고 대승불법의 이치를 연구하여 통달하였고,
大藏諸經,無不精硏,爲緇髡宗師及我朝 太宗闢佛時,心乃作頭陀形,居於雙林洞,諸經盛
대장제경,무부정연,위치곤종사급아조 태종벽불시,심내작두타형,거어쌍림동,제경성
→ 모든 대장경을 정밀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 치발종사가 되고 조선조 태종대왕이 불교를 억누를 때에 마음은 이에 머리에 부처모양의 머리를 만들고 쌍림동에서 살면서 모든 경서를
樻中,藏於墻壁間,三十年後,僧智嚴來到,其居願學焉,心牢拒不肯嚴留,住三年不去,心知
궤중,장어장벽간,삼십년후,승지엄래도,기거원학언,심뢰거불긍엄류,주삼년불거,심지
→ 궤짝에 넣어 담벼락 사이에 감추어 보관하였다, 30년후에 스님 지엄이 와서 그곳에 살면서 배우기를 원하였다. 마음을 굳게 먹고 머물러 3년을 가지 않았다. 그 마음과
其誠意,始出墻壁經敎之,嚴通貫然後乃去,遂爲宗師,國初佛幾乎熄跡,賴心得傅僧輩
기성의,시출장벽경교지,엄통관연후내거,수위종사,국초불기호식적,뢰심득부승배
→ 그 성의를 알고 비로소 담벼락 사이에서 불경을 꺼내어 가르치어 지엄이 통달하고 꿰뚫은 연후에 보냈다. 그래서 드디어 지엄도 종사가 되었다. 조선초에 불교를 여러번 없애려 하였으나 여러 스님들의 심력에 힘입어 전함을 얻었다.
至今宗師之
지금종사지
→ 지금도 정심을 종사로 받든다.
∠緇流치류;불교를 말하기도 하고. 스님을 말함 ∠宗師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스승
* 雪囧 설경
號惠庵,居乾川寺,聽警超凡,大乘文字,一覽輒記,年二十四,盡闕諸經,
호혜암,거건천사,청경초범,대승문자,일람첩기,년이십,사진궐제경
→ 호는 혜암이고 건천사에 거주한다, 듣고 살피는 것이 범인보다 뛰어나서 불경을 한번만보면 기억했다. 24세에 여러 불경을 모두 읽고
遊覽域中名山,歸而示寂,有異瑞逮浮圖
유람역중명산,귀이시적,유이서체부도
→ 나라 안에 있는 명산과 대찰을 유람하고 돌아와서 별세 하였다, 그의 부도에 서기(瑞氣)가 환하게 일었다고 한다,
∠示寂=入寂 ;죽음(불교용어) ∠浮圖부도;浮屠=화장한 유골을 넣어 모신 탑.
*震言 진언
覺性之後,三南僧人,皆宗師之時,住乾川寺
각성지후,삼남승인,개종사지시,주건천사
→ 불성을 깨달은 후 남쪽 승려들이 모두 종사로 받들었다. 건천사에 주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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